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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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內北面)

아시리(牙時里)

1. 위치

면적 1.59㎦, 인구 17가구 45명(1999년 말). 본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문암리(門岩里), 서는 봉계리(鳳鷄里), 남은 보은읍(報恩邑), 북은 구티리(九峙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 아시뱅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아시리라고 하였다.


3. 자연마을

  • 도랫말 : 산에서 큰바위가 떨어져 그 바위를 돌아가야 하는 마을
  • 아시뱅이(牙時里) : 골짜기가 집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오늘 날 마을에 들어선 지점이 아씨방(別堂)에 해당된다고 함.

4. 기타지명

  • 가장골(가장골) : 아시뱅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노적봉 : 아시뱅이 남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낟가리를 쌓은 형상임
  • 매봉재 : 아시뱅이 북쪽 수옛산에 있는 봉우리로 매를 풀어 놓고 꿩사냥을 하던 곳이라고 함.
  • 무내미 : 아시뱅이 남쪽에 있는 산으로 천지개벽 당시 산으로 물이 넘어와 산 정상에 배를 매어 놓았다고 함
  • 밀개봉 : 아시뱅이 남쪽 노적봉 아래에 있는 산으로, 밀개처럼 생김
  • 불공고개 : 아시리에서 보은읍 중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산막골 안쪽에 있는 고개로 속리산으로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불공고개 - 수철령 - 무수목 - 북암 - 소리목 - 속리산에 이르렀다고 하며, 흙이 붉어서 불공고개라고도 하였다.
  • 불당골 : 아시뱅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불당사라는 절이 있었음.
  • 산막골 : 아시뱅이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줄기가 끝나는 골짜기.
  • 산제당골 : 예부터 산제를 올리는 산제당이 있었으나 1975년 화전정리로 인하여 없어짐.
  • 섬바위 : 아시리 동쪽 불당골에 있는 바위로 높이 2.5m, 세로 3m, 가로 6m가 되며, 쌀가마니를 쌓아놓은 모양을 하고 있음.
  • 선반다리 : 아시리 동쪽에 있는 밭으로 아씨방(別堂)에 걸려 있는 선반 위에 해당하며 실제로 선반이 걸려 있는 형상을 하고 있음.
  • 소리목 : 아시리에 있는 고개로 소나무가 무성하였다고 함.
  • 수옛산 : 아시뱅이 북쪽에 았눈 산임.
  • 아시방 : 아시리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
  • 아시뱅이고개 : 아시리에서 문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 아홉모랭이 : 아시리에 있는 산으로 아홉 개의 고개가 있다고 함.
  • 우골 : 아시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소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함.
  • 정물 들 : 아시리 남서쪽 효자문이 있는 들녘
  • 팔교정 : 아시리에 있는 느티나무 정자, 능성 具씨 8대조가 심었다는 나무로 여덟그루를 심어 정자로 사용했었는데, 현재 일곱 그루가 남아있음. 옛날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려고 한양으로 갈 때, 마을 앞을 지나게 되는데 느티나무 그늘에서 쉬었다가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 푯대봉 : 아시리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봉화대가 있었고, 산정상에 측량시에 사용했었다는 푯대가 있음.

5. 문화유적

  • 구이극효자문(具爾極孝子門)
    아시리에 있는 능성 구씨 종중 소유의 정문이다. 효자 능성인 구이극과 그의 조카 시영(始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38년 (헌종 4년)에 명정되었다. 구이극은 봉일(鳳逸)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지성으로 부모를 모시고 형제간 우애가 극진하였다. 구시영은 이익의 아들이요 이극의 조카로 효행이 지극하였고 흉년이 들어 도적이 집에 들어와 칼로 부친을 위협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도적과 싸우다 부친을 대신해 죽으니 그의 나이 20도 채 못되는 젊은이였다. 1838년 두 사람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고 1860년(철종 11년)에 증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전설

  • 섬바우
    약 150년전, 불당골에는 불당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고, 이 절의 주지는 매우 자애롭고 어진 중이었다. 그런데 이 주지는 매일같이 공양미를 받으려고 신도들의 집을 찾는 것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다니며 불공미를 받아 왔는지 절 마당에 산같이 쌀가마니를 쌓아 놓았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 주지를 ‘불공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중’이라고 비웃었으나 그래도 주지는 날마다 열심히 공양미를 받아다가 쌓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었다. 거리마다 아사하는 시체들 먹을것이 없어 아우성이었다. 관청에서 주는 구호곡으로는 턱부족이었으니 산골에서는 근초목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곡기를 일흔 사람들은 부황으로 얼굴이 누렇게 부풀러 올라 그의 참상은 형언할 길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불당사 주지 스님은 쌀가마를 짊어지고 신도들 집을 찾아가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호행각을 나섰다. 그제서야 주지스님의 선견지명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불당사에는 도적들이 들어와 불을 지르고 곳간의 곡식을 훔쳐가는 순가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시꺼멓게 끼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불은 꺼지고 도적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쌓아 놓았던 공양미들은 돌로 변한 후였다. 더욱이 놀라운 일은 절 앞에 있었던 두개의 탑이 바위로 변하여 나란히 서 있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탑이 변하여 ‘탑바위’라 부르게 되었고 불당사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불당골’이 되었다.
  • 수옛산
    원래 수옛산은 봉계리 곽씨 문중의 산이었다고 하는데, 곽씨 문중에서 아시리 구씨 집안으로 선사했다. 어느 날 아시리 구씨 한 분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노루 한 마리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발 아래에 엎드렸다.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눈치 챈 나무꾼 구씨는 노루를 나뭇짐 속에 숨겨 주었다. 사냥꾼들이 지나간 후, 나뭇짐 속에서 노루를 내놓자 도망갈 생각도 않고 네 발로 나무꾼이 서 있는 앞을 헤집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그곳이 ‘명당자리’라 생각하고 조상의 묘를 이장하였다. 그 후 아시리 구씨 집안은 날로 번성하였고, 봉계리 곽씨네 집안은 쇠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