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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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馬老面)

관기리(官基里)

1. 위치

면적 2.3㎢, 인구 377가구, 1,148명(1999년말),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송현리(松峴里), 서는 탄부면(炭釜面), 남은 기대리, 북은 수문리(水門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왕래면의 지역으로서, 왕래원(王來院)이 있었으므로 관터 또는 관기(館基)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여리와 탄부면 구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관기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골안마을 : 관기초등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관기 1리에 해당됨. 큰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골안이라 부름.
  • 동녁 : 관기 동쪽에 있는 마을.
  • 섯녁 : 관기리 중심에 있는 마을.
  • 아랫사여(下士余) : 사여리 마을중 아래에 있는 마을.
  • 웃사여 : 관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 사여리 마을중 위에 있음.

4. 기타지명

  • 강칭이골 : 관기 동쪽 끝에 있는 골짜기로 산 지형이 칭이(키)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생김.
  • 고봉산(孤峰山) : 고봉들 가운데 외따로 있는 산. 옛날 천지개벽 당시 시루봉에서 상봉이 떠내려와 외롭게 정착되었다고 해서 고봉(孤峰)이라고 함.
  • 관터들 : 관기리 남쪽에 있는 들녘
  • 구렁고개 : 관기에서 돌쇠로 넘어가는 고개. 임진란 때 이여송(李如松)이 산세로 봐 큰 인물이 나올 것 같다 하여 산혈을 끊었다고 함.
  • 굴바우 : 사여리 남쪽에 있는 바위로 굴이 뚫려 있음.
  • 늑대골 : 사여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늑대가 많이 살았다 함.
  • 단지밭골 : 사여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단지를 묻고 그곳에 식량을 감추었다고 함.
  • 둑재 : 웃사여 남쪽 뒷산 제방둑이 생겼다 하여 둑재산.
  • 범정골 : 북골과 은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범같다 하여 범정골.
  • 북골 : 웃사여 동쪽의 골짜기로 오목하고 아늑하여 북골.
  • 비손바우 : 사여리 서쪽 300m 지점에 있는 바위로 정월 보름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원을 빌었다 함.
  • 성밑(성뫼) : 사여리에서 서쪽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옛 성터가 있음.
  • 옥관머리(모롱이) : 전에는 옥터가 있었다고 함.
  • 은골 : 둑재 동쪽에 뻗어있는 골짜기로 은이 났었다고 함.
  • 응골 : 사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응달진 골이라 함.
  • 잣바퉁이골 : 웃사여와 아랫사여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잣나무가 많았음.
  • 재경골 : 지형이 작약꽃이 핀 모형이라서 작약골이라고도 함.
  • 질기고개 : 사여들에서 소여리 은골로 가는 고개가 길다고 하여 질기고개라고 함.

5. 문화유적

  • 고봉정사(孤峰精舍)
    관기리 458-1 고봉 밑에 있는 고적으로 삼현정(三賢亭)이라고도 함. 조서 중기에 충암 김정(金淨)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삼파연류봉을 고봉이라 하고, 원정 최수성(崔壽城)이 고봉정을 건립하고 1519년 중종 4년 기묘사화 후 이곳으로 은거한 병암 구수복(具壽福)이 이어 받았다. 후에 정자가 퇴락하여 구수복의 5대손 일봉 이천이 봉 아래로 옮겨 지을 때, 지금의 건물로 세워졌다. 최수성, 김정, 구수복 3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충북지방기념물 제 51호)
  • 관기산성
    보은에서 상주를 가다가 관기리에서 오른쪽 남쪽으로 꺽어 금계천을 따라 오리쯤 가게 되면, 보은에서 남동으로 흘러내려온 보청천과 합류하는 곧바로 동쪽 산에 있는 산성을 말함.
    이 산성은 상주행로와 청주행로를 막는 한편 금계천을 받은 보청천을 통해 옥천의 산계리 토성 굴산성(屈山城)과 통하게 된다. 성곽은 458.5m이고, 성안에는 신라의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과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 신라가 쌓은 산성임을 알 수 있다.
  • 구수복묘비
    조선 중종(李朝 中宗)때 기묘(己卯) 명현(名賢)의 한 분인 능성인 병암 구수복의 묘비, 조선 숙종(肅宗)때 세움.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 전주 이씨 열녀문(全州 李氏 烈女門)
    능성인 병암 구수복의 부인인 전주 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537년 중종 32년에 명정되어 세운 정문이다. 최초에는 마로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음.
  • 왕래원터(王來院址)
    관터에 있는 왕래원터. 고려 31대 공민와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에서 와서 있다가 상주를 거쳐 청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머물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