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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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馬老面)

적암리(赤岩里)

1. 위치

면적 6.8㎢, 인구 87가구 232명(1999년말). 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 서는 갈평리(葛坪里), 남은 임곡리(壬谷里), 북은 내속리면(內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왕래면의 지역으로서 적바위가 있으므로 적바위 또는 적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적암리라 해서 마로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사기막말 : 상주시계에 위치한 마을. 조선 선조때 이명백이란 장군이 임란중 스승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킬 때 스승의 만류로 참전치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병을 간호하던 중 금산에서 의병들이 패하여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령, 중모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워 전과를 거두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한 순국을 하였다. 여기에서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인 곳이라 하여 ‘사기막’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또한 사기를 굽던 곳이라고도
  • 안말 : 사기막 마을을 말함.
  • 주막뜸 : 사기막 남쪽에 있는 마을. 주막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적암휴게소가 자리하고 있다.

4. 기타지명

  • 남산모롱이 : 베루들 북쪽에 있는 모롱이.
  • 넓은골 : 적암리에 있는 넓은 골짜기.
  • 도마티들 : 적암 서북쪽에 있는 들. 옛날에는 집이 있고 사람이 살던 곳으로 도적이 심해 집이 없어지고 들로 변함.
  • 먹골 : 먹산 동쪽 골짜기.
  • 먹뫼들 : 먹산 북쪽에 있는 들.
  • 먹산 : 적암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비란이라는 새가 먹을 먹으러 온다는 산.
  • 바구시샘 : 시루봉 밑에 있는 샘으로 장수가 시루봉에서 수련하던 중 말의 먹이를 주던 곳이라 함. 샘의 길이가 4m 깊이가 20m나 된다고 함.
  • 베루들 : 적암 서쪽에 있는 들로 벼루 모양이라고 함.
  • 보은바위 : 적바위를 말함.
  • 북바위골 : 적음터에 있는 바위로 북 같이 생겼음.
  • 붉은디기 버딩 : 적암 북쪽에 있는 버딩으로 흙이 붉음.
  • 비양골 : 스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새목이고개 : 적암에서 상주시 화남면 평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모양이 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함.
  • 세창고개 : 적암에서 붉은디기로 넘어가는 고개로 쉬어가는 고개라 새참고개라 하던 것이 ‘세창고개’로 변한 것임.
  • 속곳바우 : 적암리와 상주시의 군계에 있는 바위로 치마바위라고도 불리움.
  • 스무골 : 적암 북쪽 골로 작은 골짜기가 많음.
  • 시루봉(증봉) : 적암에 있는 높이 320m의 산으로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함. 보은(報恩)의 4증 8항 동쪽에 있다 하여 동증이라고 함.
  • 신선대 : 스므골 위쪽에 있는 기우제 터 예전에 신선이 내려왔다고 함.
  • 쌀바우 : 적암리 시루봉 중턱에 있는 바위.
  • 원골(원터) : 조선시대 관리와 행인들의 숙식을 제공해 주던 역원이 있던 터.
  • 임신바우 : 사기막 마을에 있는 바위.
  • 장기판들 : 신선이 장기를 두는 형국이라고 함.
  • 적바위(보은바위) : 구병산 동쪽에 있는 바위로 색깔이 붉어 적바위라고도 하며, 충북과 경북의 도계에 바위가 두 개 있는데, 보은쪽에 있다고 하여 보은바위라고 함.
  • 전진바우 : 적암 남쪽에 있는 바위에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 새겨짐
  • 해상골 : 스무골 동쪽골로 바다같이 골짜기가 깊다고 함.
  • 횟골 : 옛날 이곳에서 회를 구었다고 함.

5. 문화유적

  • 적암리 청자요지(靑磁窯址)
    유구가 두 곳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적암리 서쪽,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는 글씨가 있는 전진바위 북쪽 40미터 정도의 구릉에 있는 무너진 요지인데 가마의 윤곽이 경사가 져 있으며, 주변에 그릇을 굽기 위한 갓바퀴와 눈바기 자국이 있는 순청자에서백자조각까지 흩어져 있어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876미터의 구병산 자라에 위치하며, 앞에는 금계천이 흐르고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요지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일찍이 요지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6. 전설

  • 보은현감(報恩縣監) 장현광의 선정(善政)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 상주군과의 도계에 ‘솟곳바위’ 또는 ‘치마바위’라고부르는 큰 바위가 있고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데 대하여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회)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장현광 선생은 서기 1554년에 태어나 서기 1637년에 세상을 떠난 분으로 자를 덕회(德晦), 호가 여헌(旅軒)이라고 부르는 이로 인동 장씨다. 그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제자이자 조카사위로 퇴계의 성리학을 전수 받았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서기 1595년에 학문이 높고 행실이 바른 분으로 추천되어 보은현감(報恩顯監 - 오늘의 군수)에 임명되어 21일간 근무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형조좌랑(刑曹佐郞 - 법무부 계장급)에서부터 공조판서(工曹判書 - 건설부장관)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나 벼슬자리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속곳 바위의 이야기는 그가 보은현감에 있다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갈 때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록 한달 가량 재직하였지만 학문과 덕이 높은지라 고을을 다스림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또한 고을 백성들도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던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소문이 나자 고을 사람들은 너나 없이 좀더 계셔서 고을을 다스려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선생의 뜻을 꺽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이별을 아쉬워 하면서 전별의 선물을 가져왔다. 그러나 워낙 청빈한 현감인지라 모두 물리치고 부임할때와 마찬가지로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 인동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행차는 어느덧 군의 마지막 적암리에 도착하고 한말만 더 가면 이제 충청도를 지나 경상도 땅인 상주였다. 선생은 걸음을 멈추게 명하고 길가 나무그늘에 앉아 보은 고을 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가슴에 만감이 오고갔을 것이다. 선생의 눈길이 멈춘 것은 가난한 자신과 결혼한 이후 고생만 하는 아내의 무릎 밑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놀라움에 크게 떠졌다. 아내 치마 밑으로 삐죽이 나온 아내의 속곳이 처음 보는 황홀한 비단옷이었다.
    “여보 부인 내가 가난하여 당신에게 옷 한 벌 못해 주었구려. 참으로 미안한 일이나 이제 부인의 속곳을 보니 처음 보는 비단이구려. 어디서 장만한 옷입니까?”하고 선생이 묻자 부인은 자랑이나 하듯 치마를 조금 더 걷어 올리며 “이 옷 말씀입니까? 우리 형편에 이와 같은 비단옷을 구할 수 있습니까? 어제 저녁에 당신께서 고향에 돌아가신다고 고을 백성이 섭섭하다고 저에게 선물로 가져온 것인데 처음 보는 비단옷이라 입고 가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한참 후에 “부인 우리는 참으로 가난하구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이 자랑이 되지는 못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때문에 나는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삼가고 청빈을 낙으로 삼아 살아왔소 그런데 비록 속곳 치마지만 남에게 폐를 주고 선물로 받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구려”하면서 다시 눈을 하늘 쪽으로 돌리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여보 제가 부덕이 부족하여 당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런 몹쓸 여자가 있습니까? 아직 보은 땅이니 저 앞에 보이는 바위 위에 두고 가면 보은에서 받은 물건을 보은에 돌려주는 것이 될 것인즉 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속곳을 벗어 바위 위에 걸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향을 떠났다 한다. 참으로 그 남편에 그 아내의 행실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부터 그 바위를 “속곳바위” 혹은 “치마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맑고 조촐한 덕행을 잊을 수 없었던 고을 백성들이 비를 세워 영원히 기리었고, 이 비는 현재 400여년이 지났지만 보은읍 죽전 2리 보은고등학교 정문 옆 길가에 우뚝 솟아있어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 쌀이 나오는 구멍바위(쌀바위)
    320미터의 시루봉 산 중턱의 절벽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는데 “쌀바위”라 부른다. 신라 때 이 바위 앞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스님 한 분이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너무나도 작은 암자여서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도 없어서 암자 뒤 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겨우 먹고 지내었다. 암자에 찾아오는 사람 수만큼 쌀이 나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바위 밑에는 쌀이 무진장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쌀이 나오는 구멍이 작아서적게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구멍을 크게 파놓았다 이제는 한꺼번에 쌀이 많이 나올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튿 날 아침에 큰 바가지를 가져가 바위 구멍에 대었다. 이게 웬 일입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쌀 한 톨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중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린 탓으로 쌀이 나오지 않자 자연히 암자도 없어지고 이 바위만 남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