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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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면(懷南面)

남대문리(南大門里)

1. 위치

면적 5.30㎢, 인구 39가구 105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85㎞ 지점인 면의 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거교리(巨橋里), 서는 청원군(淸原君) 문의면(文義面), 남은 어성리(漁城里), 북은 회북면(懷北面)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호점산성의 남문 밖이 되므로 남대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동(晩旨洞), 거구리(巨九里)와 후곡리(後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남대문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거쿠-리(巨九里)[마을] 남대문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아홉사람의 부자가 세력을 피며 살았다고 함.
  • 남대-문(南大門)[마을] 남대문리의 중심마을. 호점산성의 남문밖이라고 함.
  • 만-마루(晩旨洞)[마을]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마을. 고려때 최영장군이 이곳에서 만지창을 만들었다 함.

4. 기타지명

  • 가마-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가마-성(성터)[성] 남대문 북쪽에 있음. 골 전체를 성을 쌓았다하여 붙여진 이름.
  • 남대문-교(南大門橋)[다리] 남대문리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 길이 150m, 폭 10m의 철근콩크리트 다리. 1980년 12월에 완공되었음.
  • 남-문(南門)[문] 남대문에 있는 문. 가마성의 남문이 됨.
  • 논-골[골] 거쿠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효자정문이 있음.
  • 느저목-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돼지-골[골] 만마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뒤견-봉[산] 거쿠리 동쪽에 있는 산. 두견새가 잘 운다고 함.
  • 만마루-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만마루까지 이어짐.
  • 말-바탕[버덩] 최영 장군이 말 달리기를 연습하던 곳이라 함.
  • 먹-뱅이[골] 거쿠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멀티-고개[고개] 거쿠리에서 어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 모악-골[골] 거쿠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모막-산(墓幕山:155m)[산] 거쿠리 남쪽에 있는 산
  • 바사리-고개[고개] 거쿠리에서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로 넘어가는 고개. 먹뱅이골 끝에 있음.
  • 배나무-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가마골 위에 있음.
  • 불무-골[골] 거쿠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불무골-고래[고래] 거쿠리에서 신곡리 뒷골로 넘어가는 고개.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함.
  • 사지뱅이-골[골] 남대문 남쪽 입구에 있는 골짜기.
  • 상수-리[산] 거쿠리 서남쪽에 있는 산. 상수리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음.
  • 서낭-고개[고개] 거쿠리에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고개. 성황당이 있었다고 함.
  • 성지-골[골] 남대문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소태-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잇는 골짜기. 가마골 위에 있음.
  • 쇠목-골[골] 만마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 함.
  • 쇠목골-고개[고개] 만마루에서 청원군 문의면 묘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쇠목골 위에 있음.
  • 안-터[골] 남대문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안-어성골[골] 거쿠리 서북쪽 어성리쪽으로 있는 골짜기.
  • 염티-골[골] 만마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염티-재(鹽峙)[고개] 만마루에서 청원군 문의면 염티로 넘어가는 고개. 염티골 위에 있음.
  • 용-굴(龍窟)[굴] 거쿠리 뒷산에 있는 15m 정도의 굴. 옛날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 갔다고 함. 한발이 심할 때 회인현감이 이 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현감이 회인읍에 돌아가기전에 비가 내렸다고 함. 회인현의 4개의 우단(우단)중 한 곳임.
  • 우래-실[골] 만마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에 항상 안개가 서려 있음.
  • 우래실-고개[고개] 만마루에서 회북면 용곡리 우래실로 넘어가는 고개.
  • 은정-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은이 나왔다고 함. 가마골 아래에 있음.
  • 이괄-바우(李适岩)[바위] 남대문의 논에 있는 바위. 가로 7m, 세로 3m 정도가 됨.
  • 인-천(人泉)[샘] 거쿠리 뒷산 용굴 속에 있는 옹달샘.
  • 질마-재[산] 은정골 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소의 질마처럼 생겼다 함.
  • 치알-봉[산] 남대문 북쪽에 있는 산. 높이 359m. 산형이 차일을 친 것처럼 생겼다 함.
  • 형제-봉(兄弟峯:319m, 300m)[산] 마남루 북쪽에 있는 산. 산 봉우리 두 개가 나란히 있음.

5. 문화유적

  • 호점산성(虎岾山城)
    남대문리 북쪽. 거교리와 회북면 용곡리 경계에 있는 토․석축 산성으로 전체의 둘레는 2.722m. 해발 280m 이상의 산봉우리 5개 및 그 사이의 계곡을 둘러 쌓았는데 지형이 매우 험준한 서남쪽 1.2㎞는 토축하였다. 성벽 안쪽의 높이는 석축은 1.8m 토축은 2.3m 정도이고 문자리는 6개소가 확인되었다. 옛 문현기록에 의하면 고을의 남쪽 9리에 있고 둘레는 858보이며 매우 험하고 오래되어 무너졌으며 안에 샘이 있어 겨울,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在縣南九里周回八百五十八步險?久遠??內有泉一冬夏不竭)고 되어 있다. 전설에는 최영장군의 태를 붙었다고도 하고 금칼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사라들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양곡이 묻혀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 김호의 묘와 고현재(金濩墓와 羔峴齋)
    만마루 뒷산에 있는 평택현감(平澤縣監) 증승정원도승지(贈承政院都承旨) 경주인(慶州人) 김호(金滸)의 묘소로 포수에게 쫒기는 꿩을 숨겨준 덕으로 꿩이 잡아준 명당이라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묘소 아래에 정면 4칸, 측면 2칸 후퇴의 목조와가 팔각지붕의 재실인 고현재(羔峴齋)가 있다.
  • 양달해 효자각(梁達海 孝子閣)
    거쿠리 입구에 있으며 현판은 효자증조봉대두동몽교관양달해지여(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梁 達海之閭) 효부증영인안동김씨지여(孝婦贈令人安東金氏之閭)로 되어 있다. 1905년(광무9)에 명정되어 남편의 아내의 효행을 기리는 정문으로 처음 신곡리에 세웠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6. 집성

  • 남원양씨(南原梁氏)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양경(梁鯨)의 후손 15호가 거주하고 있음.

7. 산업

고추, 두류, 과수.


8. 전설

  • 이괄바위
    이괄이란 사람은 1587년(宣祖 20년)에 태어나 1624년(仁祖 2년)에 죽은 반란자이다.
    그는 자를 백규, 본관이 고성으로 참판(오늘날의 차관) 육의 후손으로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여 선조 임금 때 형조좌랑(오늘날 법무부 계장급)과 태안군수를 지내고 1622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오늘날의 군사령관급)로 임명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이듬해 거사일에 작전지휘를 맡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해 후금과의 마찰로 국경에서 싸움이 잦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발탁되어 영변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성을 쌓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국경수비에 힘썼다.
    1624년(仁祖 2년)에 그의 아들 전(旃)이 당시 지식층과 친구가 되어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횡포로 정치가 문란케 되었다고 개칸한 일이 있었던 바 이것이 과장되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무고로 발전되어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정부에서 수사관을 파견하자 반정시 공로가 으뜸임에도 불구하고 공신등급을 책졍할 때 저사공신 2등으로 취급한 일과 자신에게 의심을 갖고 있는 정부의 공신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되어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만이 지휘하는 정부군과 사워 참패를 당하자 이천으로 도망갔다가 부하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현재 회남면 남대문리에 있는 이괄바위는 원래 산에 있던 바위라 하는데 이괄이 이곳을 떠나면서 이 바위를 가리키면서
    “만약 이 바위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가 이천에서 부하인 기자헌에게 죽은 날 밤 뇌성벽력이 일면서 그 커다란 바위가 절벽에서 무너져 내려 논에 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이 이 일로 하여 이 바위를 이괄바위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 용굴과 인천
    먼 옛날 이 거쿠리 마을에는 서울에서 당파싸움에 쫓겨온 어느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일월”이라 부르는 미인의 여인 하나만 데리고 이곳에 와서 숨어 살았고 그 여인은 벼슬아치의 사랑하는 기생 첩이었다고 한다. 원래 어려서부터 글만 배운 탓으로 그 대감은 농사일이란 하나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일월은 주막을 차려 손수 술을 빚어 팔아 연명래 갔다. 그리고 일월은 팔을 걷어부치고 때로는 산에 가서 나무도 해왔고 이웃집 농사일도 거들어 주면서 남편을 편안하게 모시고 살아갔다. 그러나 신분을 감추고 사랑가는 두 사람들인지라, 나이 많은 영감이 젊은 아내를 의지하여 살아가는데 대하여 마을 남녀 노소들은 빈정거렸고 젊은 남성네들이 일월이 나무를 해올라치면 틀어박혀 책만 보면서 가냘픈 젊은 아내를 부려먹는 대감에 대하여 대놓고 욕지거리를 하기도 하였다. 대감은 차차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꼈고 일월에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일월의 곱던 얼굴은 이제 새까맣게 변해 버렸고 손은 마치 거북등같이 터졌고 손가락 마디마디 못이 박혔으나 여인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도끼삼아 남편을 봉양하였다. 대감은 더 일월의 고생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일월은 고생을 면할 길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어느날 일월이 나무를 하러 간 사이 새끼줄을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 용굴 옆에 서 있는 소나무 가지에 줄을 걸고 목을 매달았다. 일월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다시 남편이 속해 있던 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동지들이 보낸 사람들이 집에 도착하여 남편을 찾고 있었다. 일월과 서울서 온 사람들, 그리고 비로소 그들의 신분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대감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대감을 발견하였다.
    일월은 구슬피 통곡하면서 이미 싸늘히 궂어진 남편이 혹시 살아날까 하여 사지를 주무르고 용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떠다가 대감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지를 주무르자 얼마 후에 대감의 얼굴에는 칫기가 돌며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감은 다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이튿날 서울로 떠나가는 대감과 일월은 죽었던 목숨을 건지게 해준 용굴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하여 생명을 구해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생명을 구해준 어진 물이라 하여 “인천(人泉)”이라 이름짓고 떠났다.
    그 뒤로부터 이 물줄기를 “인천”이라 부르게 되었고 일월을 열녀라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많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대감을 살려준 이 물줄기에 모여들었는데 물빛이 마치 우유색깔 같았으며 물맛이 차고 매웠다. 특히 이 물은 위장병환자에게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하루에도 물의 양이 일정치 않고 많게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적어지고 적게 나오다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