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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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면(水汗面)

교암리(敎岩里)

1. 위치

면적 2.07㎢, 인구 58가구 162명(1999년말). 본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발산리(鉢山里), 서는 오정리(梧亭里)), 남은 성리(星里), 북은 병원리(並院里)에 접하여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수한면의 지역으로서 세조(世祖)가 속리산에 행차하였을 때 이곳에 이르러 병풍바위를 가르키며 “참 큰 바위로다.”하였으므로 가르침바위 또는 교암(敎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거묵동(巨墨洞)을 병합하여 교암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거목-골(巨墨洞):교암 서쪽에 있는 마을. 우암 송시열(宋時烈)선생의 아우인 세한재 송시도(宋時燾)의 장례를 지낼 때 많은 사람들이 수레를 타고 왔다하여 거마동(車馬洞)이라 하던 것이 거먹골로 변하였다 함.
  • 교암(敎岩,가르침바우):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할 때 이 마을앞에 이르러 큰 바위를 가르키며 가르침바우라 하였다고 함.
  • 새-터:가르침바우. 서쪽에 새로된 마을. 봇물을 대서 농사를 짓는 들이라 하여 보뜰이라고도 부름.

4. 기타지명

  • 가르침바위(敎岩):교암 입구에 있던 바위로 크고 넓어 그 위에 정자를 지어놓고 마을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함. 1939년 도로확장공사로 없어졌음.
  • 각골:거먹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모양이 뿔과 같이 생겼다 함.
  • 감상골:잿들 동족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암생어사가 나왔다 하여 감사골이라 함.
  • 거먹골 소류지:거먹골 남서쪽에 있는 못. 일제말엽에 조성됨.
  • 마칠목:멱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여러 골짜기중 가장 끝에 있다고 함.
  • 멱골:가르침바위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골 모양이 고양이같이 생겨서 묘골이라고도 함.
  • 모래재:멱골에서 동정리 감투봉 밑으로 넘어가는 고개. 풀이 없고 모래만 있다하여 모래재라 함.
  • 바래미고개:가르침바위에서 발산리 바래미로 넘어가는 고개
  • 병풍바우:가르침바위 북쪽에 있는 바위.세조께서 행차시 큰바위라 가르킨 바위로 병풍처럼 생겼다 함.
  • 비리고개:거먹골에서 성리 비리로 가는 고개
  • 속샴:동네 안에 있는 샘
  • 승지골:지신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승지골에 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승지벼슬을 하였다 함.
  • 은골:거먹골 남쪽에 잇는 골짜기. 토질이 기름져 농사가 잘된다고 함.
  • 잿들:가르침바위 남쪽에 있는 들. 토질과 수원이 좋지 않아 해마다 농사가 잘 되지 않음.
  • 줄골:각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여러개 있어 줄골이라 함.
  • 지신터골:각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잡초나 잡목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짓은터골 또는 지신터골이라 함.
  • 칠봉산(七峯山):교암뒤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일곱이라 함. 비가 오지 않으면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함.

5. 문화유적

  • 송시도 묘(宋時燾 墓)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아우인 은진인(恩津人) 세한재(歲寒齋) 송시도의 묘로 묘갈은 송석주(宋奭周)가 짓고 후손인 치규(穉圭)가 쓰고 전한 것으로 1827년에 건립하였다.

6. 전설

  • 가르침바우
    수리티라는 마을에 수재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거리고개에 살고 있는 스승을 찾아가는 길에 이 바위 밑을 지나게 되었는데 바위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올려다 보니 밧줄이 하나 내려와 있었다. 수재가 이 밧줄을 타고 올라가 보니 노인 둘이 띠를 짜고 있었다. 잠시 옆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까 그 노인이 “수재야 속히 가거라. 그래야만 스승을 만날 수 있으니라.”하고 호령하기에 일어나 내려 오려 하니 올라 올 때 잡았던 밧줄은 다 썩어 있었고 노인들이 다시 준 밧줄을 잡고 내려와 보니 밧줄도 노인도 종적없이 사라지고 바위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이 바위가 사람을 가르쳤다 하여 가르침바위(敎岩)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o세조임금이 영월고을로 귀양보낸 어린 조카요, 선왕인 단종을 무참히 살해한 후 어느 날 용상에서 낮잠을 잘 때였다. 단종의 어미니요 형수인 현덕왕후(賢德王后-文宗의 )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 깨어보니 가위를 눌린 것인데 전신이 땀에 흥건히 젖었다. 세조는 기분이 언짢아 가만히 앉아 있는데 맏아들인 도원대군(桃源大君.뒤에 德宗으로 추존된 成宗의 아버지)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세조는 현덕왕후의 짓이라 믿고 즉시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치고 황후의 시신을 평민의 무덤같이 만들어 묻도록 하였다.
    그날 저녁 세조는 꿈에 현덕왕후를 다시 만났는데 왕후는 눈을 흘기면서 세조에게 침을 뱉으며 사라졌다는 것이며 이튿날 침자욱이 곪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전의감(典醫監)을 통하여 좋다는 약과 의원을 총동원하여 갖은 치료를 다했으나 허사였다. 세조는 마침내 자신의 병이 약으로는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부처의 힘으로 고쳐 볼 양으로 명산 대찰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말하자면 피접(避接-앓는 사람이 장소를 바꾸어 요양하는 것)을 하기로 결심을 한 것인데 1464년(世祖 10年 甲)에 세조는 보은 속리산에 행차했다. 세조는 청주에서 피반령을 넘어 회인을 지나 다시 차령을 넘어 보은으로 왔다. 그 때 많은 일화를 남겼고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지금의 보은군 수한면 교암리 앞을 통과할 때였다. 연(輦-임금의 타던 덩모양의 가마)안에서 지루함을 달래 길 없던 세조는 눈을 들어 길옆 냇가를 바라보며 가고 있었다. 그 때 장엄한 바위가 푸르슴한 냇물에 수려한 자태를 비추며 마치 일행을 맞아들이는 형태로 보였다. 그런데 그 바위를 보자 세조는 지난날 왕위를 빼앗고자 많은 충신을 참혹하게 처단한 일과 어린 조카를 살해한 일들이 머리에 주마등처럼 떠올라 자책감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세조는 행렬을 멈추게 한 후 바위 앞에 나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바위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바위는 세조의 모든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고 부드럽게 감싸안는 듯이 세조에게 느껴졌다. 얼마를 그렇게 바위 앞에 서 있던 세조는 바위를 가르키면서 “이 바위는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바위다.”라고 말하며 그곳을 떠나 속리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바위 이름을 “가르침바위(敎岩)”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1939년 국도(청주~진해선)를 개설할 때 바위는 폭파되어 그 모습을 찾을 길 없고 가르침바위를 어원으로 한 마을인 교암리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