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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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속리면(內俗離面)

사내리(舍乃里)

1. 위치

면적 22.3㎢, 인구 625가구 1814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동쪽 6㎞ 지점인 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대목리(大木里), 서는 북암리(北岩里), 남은 상판리(上板里), 북은 경북(慶北)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법주사(法住寺)가 있으므로 사내골, 또는 사내동(舍乃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新基) 민판동(民判洞)을 벼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민판-골(民判洞)[마을] 사내골 북쪽에 있는 마을. 조선초기 황참판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속세에 은거하다 별세하자 그 자손들이 시묘한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하여 ‘민판동’이라 함. 사내 3리의 으뜸되는 마을임.
  • 사내-골(舍乃洞)[마을] 사내리의 으뜸되는 마을.
  • 새-터(新基)[마을] 민판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1907년 신설되었다 함.
  • 중-뚱지[마을] 청주나들 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절이 있었다 함.
  • 청주-나들[마을] 사내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청주 관가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함.

4. 기타지명

  • 감로천(甘露泉)[샘] 문장대 북쪽 틈 사이에 있는 옹달샘.
  • 개미-골[골] 법주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쉰 동굴이 있음.
  • 거북-바우(龜岩)[바위] 수정봉 정상에 있는 넓고 편편한 큰바위 상하 두 계단으로 깔려서 백여명이 앉아 즐길 만하며 한눈에 법주사 경내 일원이 똑똑히 보임.
  • 걸방-바우[바위] 민판동 서쪽에 있는 바위.
  • 경업-대(慶業臺)[바위] 금강골 북쪽에 있는 바위. 입석대 좌측 아래가 됨.
  • 경업대-토굴(慶業臺土窟)[굴] 법주사 동북방 5.5㎞ 위치한 경업대에 있는 자연동굴. 조선명장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스승인 독보대사(독보대사)와 같이 7년간 수도하였던 곳이라 한다. 토굴 속에 맑은 옹달샘이있으니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 관음-골(觀音溪)[골] 관음봉 아래 골짜기. 속사티로 넘어가는 등신로 일대로 장엄한 계곡이다. 울창한 수림사이로 맑고 찬 시냇물이 흐르며 뭇 산새 울음소리와 화음을 이루고 있다. ‘큰물골’이라고도 부른다.
  • 관음-봉(觀音峰 : 9983m)[산] 법주사 북쪽 계곡 안에 있는 봉우리로 문장대 서쪽으로 ‘큰물골’ 건너에 있음. 관음이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말한다. 보살은 대자 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우면 곧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 관음-암(觀音庵)[절] 법주사 동북쪽 4.52㎞ 지점에 위치한 절로 ‘경업대토굴’이라고도 부름.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라고 하여 관음암이라 하였다고함. 663년 (신라 문무왕 3) 회월대사(晦月大師)가 60게때 창건하고 168세때 입적하였다고 하는데 장수의 비결은 아침에는 새벽공기를 마시고 낮에는 솔잎을 먹으며 저녁에는 과음암의 장군수를 마신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음.
  • 금강-골(金剛溪)[골] 태봉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좌,우에 경업대와 비로봉이 솟아 있는 계곡으로정상에 입석대가 있어 ‘입석동(立石洞)’ 이라고도 한다. 금강산같이 경치가 좋다고 하여 골짜기 안에 비로산장과 금강휴게소가 있다.
  • 금강-소(金剛沼)[소] 목욕소와 세심정 사이에 있는 웅덩이. 바위 사이로 약 2m의 폭포가 있다.
  • 남-산(南山 :634m)[산] 법주사 남쪽에 있는 산. 산자락의 가을 단풍이 절경이다.
  • 남산-약수(南山藥水)[샘] 법주사 남쪽 3km 지점인 남산 바위 사이에서 솟아나는 물로 맑고 단맛이있어 한 번 마시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이 약수는 깨끗지 못한 일이 있으면 즉시 말라 나오지 않고 마음이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오히려 피해를 본다고 함.
  • 냉천-골(冷川溪)[골] 중사자암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문장대 등산로가 됨.
  • 달마-골(達磨溪) 세심정서쪽에 있는 골짜기. 문장대 등산로 길목으로 골안에 ‘용바위골휴게소’가 있다.
  • 달매-재[고개] 중사자암 남쪽에 있는 고개. 달마골을 이용하여 문장대로 넘어가는 고개.
  • 도독-골[골] 민판동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동-암(東庵)[절] 법주사 뒤쪽 200m 지점에 이쓴 산내 암자임. 창건은 구전에 의하면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암자의 배치는 선원(禪院)을 중심으로 좌우의 앞쪽으로 두 요사가 있고 입구에서 가장 안쪽으로 법당이 들어서 있다. 법당은 1979년 정오(正浯) 선당은 1978년 요사는 1978년 1979년에 건립되어 1980년 1월 21일 낙성한 것이다.
  • 돼지-바우[바위] 법주사 동쪽 태평휴게소 위쪽에 있는 큰 바위. 돼지와 흡사하다고 함.
  • 돼지바우-골[골] 돼지바위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까지 이어진다.
  • 뛴금-바우[바위] 경업대에 있는 바위.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함.
  • 목욕-소(沐浴沼)[소] 법주사에서 북천암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웅덩이.
  • 문장-대(文藏大)[바위] 법주사동북쪽 6km 지점에 솟아 있는 큰 바위 덩어리. 해발 1,028m의 봉우리로 50여명이 앉아서 놀 수 있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 ‘운장대(雲藏臺)’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물푸리-골[골] 사내리 시외버스주차장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밤나무-골[골] 민판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밤나무가 많이 있다고 함.
  • 배석-대(拜石臺)[바위] 천황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있는 바위. 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함.
  • 밤-바우[바위] 민판동 서쪽에 있는 바위. 범이 앉아있는 모습과 같다고 함.
  • 법주-사(法主寺)[절] 대하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553년 (신라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법주사라고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이 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표가 중창한 이래 이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의 증수를 거쳐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전소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의 증건 증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보현-재(普顯峙:621m)[고개] 북천암 북쪽 문장대 등산로에 잇는 고개. 정상이 가파르므로 ‘할딱고개’라고도 부르고 있다.
  • 북천-암(福泉庵)[절] 법주사 북쪽에 있는 암자. 법주사 산내암자중 가장 규모가 크며 반월형의 기이한 모습으로 건축되어 있다.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며 현재 암자의 본당인 극락전의 현판 ‘무량수(無量壽)’는 고려공민왕의 어필이다.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난치병을 치료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그때 이 암자에서 신미(信眉)와 학조(學祖)의 두 고승과함께 3일동안 기도를 드린뒤 암자에 이르는 길목의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으므로 절을 중수하였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옥판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큰 암석이 있고 그 속에서 청명한 청수가 솟아 흘러나오고 맑고 영롱하며 담백한 맛이 있어 복천이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 봉곡-암(鳳谷庵)[절] 민판동 서쪽 승바골에 있는 암자. 구전에 따르면 1606년(선조 39)에 벽암각성(碧巖覺性)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61년 송행신(宋行信) 비구니가 흙벽돌로법당, 삼성각, 요사 등을 중창하였다.
  • 북가-재(北加峙:779m)[고개] 민판동에서 상주시화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북가추리’라고도 부른다.
  • 북가치-골[골] 사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북가재로 가는 길목임.
  • 붉은디기-골[골] 민판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비로-봉(비로봉:1029m)[산] 법주사 동북쪽 5.4km 지점에 있는 산봉우리. 비로란 비로지나불(毘盧蔗那佛)을 줄인말로서 ‘모든곳을 두루 비친다(遍照一切處)’란 뜻으로 광명을 뜻한다.
  • 사내실-골[골] 사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사내-천(舍乃川)[내] 사내골 동남쪽에 있는 내. 수원이 삼파수의 하나로 한강으로 흐른다.
  • 산지창-골[골] 민판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민판동에서 법주사로 가는 길목임.
  • 상고-암(上庫庵)[절] 비로봉 밑에 있는 암자. 720년(성덕왕 19)에 창건 하였으며 처음에는 법주사를 짓기 위하여 자재를 저장하였던 창고로 이용되다가 뒤에 암자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비로봉을 중심으로 모자성을 구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던곳이라 해서 뒷날 상고암이라고 부르게되었다고도 한다. 1876(고종 13) 인명대사(仁明大師)가 중창하였고 1897년(광무 2)에 보봉(普峰)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광복후 황폐화 되었다. 1963년 법혜(法慧)의 원력으로 다시 세웠고 1975년에 극락보전 1976년 영산각과 남북통일기원탑을 세웠다. 원래 속리산에는 상고, 중고, 하고의 3고가 있었으나 중,하고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 상환-암(上歡庵)[절] 법주사에서동쪽으로 3.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암자.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다. 1391년 (공양왕 3)에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1464년(세조 10)에 왕이 이 곳에 서동하여 선왕의 유덕을 추모하는 즐거움이비할데 없다 하면서 ‘상환암’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 아래에 중환 하환의 고적이 있는 것을 보면 상환의 상은 임금을 뜻하는 존칭은 아닌듯한다. ‘상관암(上觀庵)’이라고 표기하는 사람도있는데착오이다. 6.25때 전소되었던 것을 1963년 원통보전과 삼성각을 1968년에 요사채를 건립하였다.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수도처로 청담(淸潭)을 비롯한 많은 고승이 머물렀고 상환암 혀파은 퇴경(退耕) 권상로(勸相老)의 글씨이다.
  • 서낭-재[고개] 사내골에서 북암리소리목으로넘어가는 고개. 성황당이 현재까지 있고 치성을 드리고 있다.
  • 석-문(石門)[바위] 금강골 서남쪽에 있는 바위. 사람이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이있음. 속리산에는 8개의 석문이 있는대 내(內), 외(外), 상환(上歡), 상고내(上庫內), 비로(毘盧), 추래(墜來), 상고외(上庫外)등으로 이 석문은 금강석문(金剛石門)이다.
  • 속리-산(俗離山:1058m)[산] 백두개간에위치하여 보은군. 괴산군과 경상북도상주시의 경계에 잇는 산.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이며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변성퇴적암이 군데 군데 섞여 있어 변성퇴적암 부분은 길게패이고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이룬다.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1028m), 길상봉(吉祥峯), 문수봉(文殊峯), 보현봉(普賢峯), 관음봉(觀音峯:983m), 묘봉(妙峯:825m), 수정봉(水晶峯:489m)등의 8개의 봉우리와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신선대(神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등 8개의 대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속리산은 본래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 하며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불리웠다 한다.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들이 구름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玉芙蓉)같이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속리산은 수려한 경치와 다양한 동식물. 큰 사찰인 법주사와여러 암자가 있고 무수한 문화 유적이 산재하고 있어. 법주사를 중심으로 천황봉,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원 1922면4618㎡를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하였고. 1970년 3월 24일 지리산, 경주, 계룡산, 한려해상에 이어 설악산, 한라산과 함께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번호 6)
  • 속사-재(俗寺峙:750m)[고개] 법주사에서 상주시 화북면 대흥리로 넘어가는 고개. 속리산에 있는 큰 절로 통하는 목으로 8목의 하나라고 함.
  • 수영동-약수(壽永洞藥水)[샘] 법주사동쪽 6km 지점인 소천황봉 바로 아래에 있는 약수 원래는 상.중.하. 3개소가 있었으며 이 약수는 상탕이라 하는데 한 모금 마시면 상쾌한 맛이 비길 데 없고 주위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노송으로 싸여 있어 별천지 같다고함.
  • 수정-교(水晶橋)[다리] 법주사입구에 있는 다리. 옛날에는 석교(石橋)로 그 위에 다락(樓)을 건립하고 다락 아래로 통행하다가파괴되어 목교(木橋)로 변경 가설하였다가 1968년 현재의 교량으로 가설되었음. 조선초기 신여선사(信如禪師)가 이 다리 위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삼천동 돌아드는 아홉구비, 한줄기냇물위에 아홉달.
    다리 밑 푸른물을 시샘하는 붉은 빛, 온 산 단풍잎이 솔가지랑 얼켰구나
    三淸洞有九重遙 一帶溪流八處橋
    橋下水明紅佦碧 滿山楓葉依松捎
  • 수정-봉(水晶峰:489m)[산] 법주사 서쪽 가장 가까이에 있는 봉우리, 수정봉이라는 이유는 법주사 남쪽에 있는 남산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하여 (수성)을 가진 수정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상에 거북바위가 있다.
  • 수정-암(水晶庵)[절] 법주사 서남쪽 200m 지점에 있는 암자. 553년 (진흥왕 14)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법주사와 함께 창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법주사 사적기에 수정암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옛터에 창건한 근세의 암자인 것 같다. 1914년 비구니 장태수(張泰守)가 이 곳에 머물면서 그 개인의 원력으로 의자(義子) 방인혁(龐寅赫)에게 위촉하여 산신각, 칠성가, 독성각과 대선방을 목수 박덕홍(朴德弘)이 김창식(金昌植)의 감동아래 신축하였으며 1973년에 극락전, 진영각, 요사체등을 중건하였다. 현재 법주사 경내의 유일한 비구니 수도장이다.
  • 승방-골[골] 민판동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봉곡암이 있다.
  • 쉰동-골[골] 법주사 북쪽 개미골 안에 있는 골짜기.
  • 쉰동-굴(五十洞窟)[굴] 법주사 북쪽 약 1km 지점에 있는 자연동굴, 임진왜란 때 이굴에서 50여명이 피난하였다고 한다. 자연젹으로 형성된 굴의 모습을 이용하여 암자를 만들고 부처를 모시고 있었으나 1975년 국가시책인 독립가옥 정리시철거되었다.
  • 신선-대(神仙臺:1026m)[산] 법주사에서동북쪽 약 5.7km 지점으로 경업대 바로 위쪽 입석대와 청법대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암석덩어리의 산봉우리.
  • 심배나무-골[골] 청주나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여적-암(汝寂庵)[절] 법주사에서 수정봉넘어 민판동 북쪽에 있는 암자. 1694년(숙종 20)여적당(汝寂堂) 경수(慶秀)가창건하였다. 그 후 1901년(광무 9)에 주지 남용익(南龍翊)이 강문환(姜文煥)의 도움으로 삼성각을 창건하였으나 6.25때 모두 불타고 터만 남았다. 현재 암자 주위에 남아 있는 터를 볼 때 암자의 규모가 컸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58년 수도승이 여적대사가 득도한 곳이라 하여 조그마한 초막을 짓고 살던 것을 1964년 행담(行潭)이 중창하였다. 경내에 정교하게 다듬어진 청석탑 1기가 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부터 있던 암자로 여적이 온 뒤부터 ‘여적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오리-숲(五里林)[거리] 사내리 마을에서 법주사에 이르는 약 2km 거리로 길 좌우에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있어 ‘오리숲’이라 한다.
  • 은폭-동(隱瀑洞)[폭포] 상환암 동남쪽에 있는 폭포로 깊은 굴속에서떨어지기 때문에 물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린다고 함.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물이란 넘실넘실 흐르는 건데, 너는 어이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사람들 더러운 발 씻을까 하여, 몸은 감추고 소리만 내네
    洋洋彌水性 何事石中嗚 恐耀?人足 藏踪但流聲
  • 입석-대(立石臺:1003m)[바위] 법주사 동북쪽 5.5km 지점에 있는 선돌모양의 바위. 밑에 철편이 박혀 있고.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세웠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왕녀인 덕만(德曼)과 왕자 법승(法昇)을 데리고 와서 피난을 할 때이 바위를 세우고 매일 아침 이 대에서 부왕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를 하였다 한다.
  • 작은-소리목골[골] 사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북암리 소리목으로 가는 길목임.
  • 작은-어우동골[골] 청소년 야영장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장군-하지기시골[골] 사내리 남서쪽, 은구모롱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장군-수(蔣軍水)[샘] 관음암 석굴 속에서 나오는 샘물, 용의 양쪽 눈에 해당한다 하여‘ 용안수(龍眼水)’라고도 부른다 임경업(林慶業)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고 한다함
  • 중사자-암(中獅子庵)[절] 문장대 아래에 있는 암자, 원래 상사자, 중사자, 하사자의 세 암자가 있었으나, 상, 하 두 암자는 폐사되었다 한다. 바위 모양이 사자와 가타고 하며 지형이 사자와 같다고도 한다. 보은 8항의 하나인 사자항이라고 이르고 있다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세조는 이 암자에서 복국이물(福國利物)을 기원하였으며 1641년(인조 19)에 지선(智禪)이 왕명에 따라 원종(元宗)의 원당(願堂)을 세울 때 능원대군(綾原大君)이 용화에 있는 전답을 이 원당에 화사하였다 1795년(영조 35)에는 왕명에 따라 명례궁(明禮宮) 궁감(宮監) 이수창(李壽昌)과 주지 현익(玄益)이 감동하여 증수하였고 1887년 (현종 3)에는 왕실에서 총섭(摠攝) 하운(夏雲)과 신영원(申英遠)을 파견하여 중수하였으며 1887년(고종 24)에는 왕실에서 천동(千銅)을 하사 받아 일시 중창하였다. 6.25때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 중건하였다. 암자 서편에 인공으로 깍은 듯한 감투바위가 있는데 차언당시 산신당 터라 하며 암자 아래 초석만 남아 있는 터는 선조(宣祖)의 원당처로 선조는 원당을 짓고 어필의 병풍을 하사하였다 한다. 이 어필병풍은 법주사에 보관중이다.
  • 천황-봉(天皇峰:1057.7m)[산] 법주사에서 동쪽으로 5.7m 지점에 있는 속리산 최고봉우리다. 삼파수(三派水)가 있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의 근원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의 근원이 되고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한강의 근원이 된다.
  • 청법-대(聽法臺:1008m)[산] 문장대와 신선대 사이에 있는 봉우리,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영혼을 잃고 방황하던 중 이 봉우리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제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 추래-암(墜來巖)[바위] 법주사 서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 그 아래 열반굴(涅槃窟)이 있고 굴속 바위벽 오른쪽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왼쪽에 약사여래(藥師如來)을 새겼음. 바위위에 한 그로의 노송과 돌탑이 있고 바위 벽에는 나무아미타불(男無阿彌陀佛)이라 새겨져 있다.
  • 큰-물골[골] 관음봉과 문장대 사이에 있는 골짜기. ‘관음골’이라고도 한다.
  • 큰-소리목[골] 사내골에서 북암리 소리목으로 가는 골짜기. 수정초등학교 옆으로 나 있으며 작은 소리목 아래에 있다.
  • 큰-어우동골[골] 청소년 야영장 남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까지 이어짐.
  • 큰-하지시기골[골] 사내리 남쪽 은구모롱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탈골-암(脫骨庵)[절] 법주사 동북쪽 2.8km 지점에 있는 암자.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고 776년 9혜공왕 12)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증건하였다 한다. 속설에 의하면 신라 탈해왕때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자신의 용모가 닭과 비슷함을 한탄하던 중 이곳에 좋은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와 약수를 마시고 아름다운 인간의 용모로 바뀌었으므로 탈골암이라 하였다는 설과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깨우쳐 생사윤회를 벗어나 해탈하게되었으므로 탈골암이라 했다고 한다. 1624년9인조 2)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나 6.25때 전소되어 폐허가 되었으나 1954년 재건하고 1975년에 중수하였다. 법당인 인법당과 삼성각 요사가 있고 1990년에 준공된 대휴서원(大休禪院)이 있었으나 1993년 인법당(인법당)이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95년 다시 건립하였다. 암자 좌측에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유명한 약수가 있다.
  • 탈골암-골[골]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탈골암길목임.
  • 탑바우-골[골] 쉰동굴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태-봉(胎峰:550m)[산] 복천암 남쪽에 있는 봉우리. 조선 제23대 순조(純祖)의 태를 1806년(순조 6)에 이 곳에 봉안하였는데 1927년 10월 서울로 옮겼다 함.
  • 학소-대(鶴巢臺)[바위] 상환암 남쪽에 있는 바위. 옛날에 학이 살았다 한다. 태조 이성계가 상환암에서 100일간 기도를 올릴 때 목욕재계하고자 냇물에 이르자학의 똥이 떠내려오기 때문에 학들을 쫓아버리고 집을 메워 버린 후 학들이 깃들지 않는다 한다.

5. 문화유적

  • 국보
    • 법주사 쌍사자석등(法主寺 雙獅子石燈)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8각석등. 높이는 3.3m 국보 제5호. 간주(竿注)에 변화를 주어 특색을 발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8각석등으로 조성년대는 720년(성덕왕 19)이다. 쌍사자는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다물고 있는 사자는 참선하는 스님을 상징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염불과 경학을 하는 스님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속설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는 숫사자이고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암사자로 힘에 부처 입을 벌리고 있다고 한다.
    • 법주사 팔상전(法主寺 哵相殿)
      법주사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오층목탑(五層木塔), 국보 제55호. 5층의 높은 검룰로 5층 옥개(屋蓋)는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고 5층위에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 탑이다.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776년(혜공왕 12) 진표(眞表)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병화로 소실되어 1624년(인조 2) 벽암(碧巖)이 중건하였다.
    • 법주사 석연지(法主寺 石蓮池)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石槽). 높이 1.95m, 국보 제 64호. 대석위에 원형의 석조를 올려놓은 형식이다. 이 석연지를 만든 것은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 뿌리를 내려 꽃을피우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듯이 우리의 현실은 서로가 시기하고 모함하는 연못의 흙탕물 같은 세상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착하게 생활하면 내세(來世)에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輪廻)적인 교리를 표현한 것이라 함.
  • 보물
    • 법주사 사천왕석등(法主寺 四天王石燈)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 신라시대의 석등. 높이 3.9m, 높이 3.9m 보물 제 15호. 이 석등은 경내의 쌍사자석등, 석연지와 공양상(供養像)을 고루 배치하여 불교의 법공양중 으뜸인 향(香), 등(燈), 차(茶)의 공양을 한꺼번에 바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 법주사 마애여래의상(法主寺 磨崖如來倚象)
      법주사 경내 암석 절벽면의 부조(浮彫)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 높이 5m. 보물 제 216호. 신라시대의 삼화령석조미륵불의상(三花嶺石造彌勒佛倚象)과 함께 매우 희귀한 의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불상이 새겨진 암석 바로 앞 바위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과 미륵불 바로 옆에 새겨진 설화도(說話圖)들은 법상종(法相宗)의 신앙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법주사가 법상종의 대가람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함.
    •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1742년(영조 18)에 관상감의 안국빈(安國賓)등 6명이 북경천문대 대장이었던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kogler, k)의 성표(星表:기산점 1723년)를 사용, 한양에서 볼 수 없는 남쪽하늘의 별까지포함하여 제작한 천문도, 8폭의 병풍으로 되어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 왕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1곡을 한폭으로 보면 183.5cm, 너비 56cm, 8폭의 전체 길이는 451cm나 되는 대형이다. 현재 법주사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 848호.
    • 법주사 대웅전(法主寺 大雄殿)
      법주사 경내에 있는 조선 중기 목조 불전(佛殿), 보물 제 915호. 1층 평면이 정면 7칸, 측면 4칸인 대포계(多包系)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건평이 170평, 높이가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이다.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極樂殿),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覺皇殿)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이며 내부에는 법신(法身), 불신(佛身), 보신(報身)의 삼존불을 중앙의 불단(佛壇)에 모셔 놓았는데 우리나라 좌불상(坐佛像)으로는 최대라 한다.
    • 법주사 원통보전(法主寺 圓通寶殿)
      법주사 경내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불전. 보물 제 91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인 정방형(正方形) 평면의 건물로서 주심포계(注心包系)의 단층 사모지붕의 건물이다. 내부에 관세음보살좌상(觀世音菩薩坐像)을 모셨다.
  • 사적 및 명승
    • 속리산 법주사 일원(俗離山 法主寺 一圓)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황봉(天皇峰), 관음봉(觀音峰)을 연결하는 일원, 사적 및 명승 제 4호 지정면적은 1922만4618㎡(5,815,421평)이다.
  • 천연기념물
    • 보은 속리산의 망개나무
      탈골암 골에 있는 망개나무로 천연기념물 제 207호
  • 지방유형문화재
    • 순조대왕태실(純祖大王胎室)
      복천암 남쪽 태봉에 있는 순조의 태실로 충북지방유형문화재 제 11호, 정조의 2남으로 태어난 공(공)의 태를 안치하였다가 왕위에 오른뒤인 1806년(순조 6)에 왕의 태실로서 석물을 갖추고 2.8m의 태실비를 세웠다.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태항아리를 창경원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석비(石碑)와 석조물(石造物)만 남아 있다.
    •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法主寺 福泉庵 秀庵和尙塔)
      복천암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부도(石造浮屠)로 높이 3.02m. 지방 유형 문화재 제12호. 조선 전기의 고승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의 부도로 1480년 (성종 11)에 조성된 것이다.
    • 법주사 복천암 학조등곡화상탑(法主寺 福泉庵 學祖燈谷和尙塔)
      복천암 동쪽 산기슭에 있는 조선 중기의 석조부도로 높이 2.96m. 지방 유형문화재 제 13호. 연산군때 고승인 학조대사(學祖大師) 등곡(燈谷)의 부도로 1514년(중종 9)에 조성되었으며 스승인 신미대사의 부도 뒤에 있다.
    • 법주사 세존사리탑(法主寺 世尊舍利塔)
      법주사 경내에 있는 고려 말기의 사리탑. 높이 3.5m 지방유형문화제 제 16호. 1362년 공민왕이 홍거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한 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였다고 함.
    • 법주사 희견보살상(法主寺 喜見菩薩像)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 전체 높이는 2.13m. 몸높이는 1.36m. 지방유형문화재 제 38호. 미륵불을 향해 머리에 고배형(高杯形)의 석기(石器)를 이고 나가는 입상(立像)으로 부조(浮彫)되어 있다. 성불(成佛)의 큰 서원(誓願)을 가지고 몸과 어깨가 불에 타더라도 아미타불(阿彌陀佛)앞에 향로(香爐)를 공양하기를 쉬지 않는 보살로 사람에게백절불굴하는 강한 의지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조성된 것이라 함.
    • 법주사 사천왕문(法主寺 四天王門)
      법주사 경내 금강문(金剛門)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조선후기의 불사(佛寺) 산문(山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건물. 지방유형문화재 제 46호. 중앙 어간(御間)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 높이 5.7m. 둘레 1.8m인 사천왕상을 2리씩 배치하였음.
    • 법주사 석조(法主寺 石槽)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 높이 1,3m 길이 4.46m. 지방유형문화재 제 70호. 법주사에 3,000승도가 살았을 당시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사용하였다고 함.
    • 법주사 벽암대사비(法主寺 碧巖大師碑)
      법주사 수정교 앞 거대한 바위위에 홈을파서 세운 청석비(淸石碑). 높이 2.1m 너비 1.1m. 두께 35cm. 지방유형문화재 제 71호. 비명(碑銘)은 유명조선국고속리산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부선교심육종도총섭자지쌍운변혭ㅜ애부종수교복국우세특사의발벽암대사비(有明朝鮮國故俗離山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傅禪敎十六宗都總攝慈智雙運辯慧無礙扶宗樹敎福國祐世特賜衣鉢碧巖大師碑)로 1664년(현종 5)에 세운 비다. 정두경(鄭斗卿)이 비문을 짓고 이우(李俁)가 쓰고 이정(李禎)이 전(篆)하였다.
    • 법주사 자정국존비(法主寺 慈淨國尊碑)
      법주사 경내 호국청동미륵상 뒤쪽에 있는 높이 2.15m 너비 1.06m의 비로 암석을 파고 세웠다. 지방유형문화재 제 79호. 삼중대광오교도승통자정국존(三重大匡五敎都僧統慈淨國尊)의 비로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세웠다. 비명은 고려국속리산법주사정국존비명(高麗國俗離山法主寺淨國尊碑銘)이고 이숙기(李叔琪)가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썼다.
    • 법주사 괘불(法主寺 掛佛)
      법주사 대웅전에 보관되어 있는 가로 6.5m 세로 14.5m의 대형 괘불탱화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119호. 1766년(영조 42)에 설월관성(雪月觀性)과 유암각증(裕巖覺證)이 증명하고 찬경(贊瓊)의 화주로 금어료훈(金魚料訓)이 그린 것이다.
    • 법주사 철확(法主寺 鐵鑊)
      법주사 경내에 있는 거대한 솥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143호. 720년 (성덕왕 19)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2m 직경 2.7m 둘레 10.8m이다. 법주사에 3,000명 승려가 있을 때 밥솥 또는 장국을 끓이는데 사용한 것이라 함.
    • 속리산 사실기비(俗離山 事實記碑)
      법주사 수정교 앞에 있는 높이 1.63m 너비 0.65m의 비로 보호각 안에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 167호. 1666년(현종 7)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쓴 것이다. 내용은 수정봉 거북바위에 내력을 쓰고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라 함.
  • 비지정 문화재
    사내리는 천년 고찰인 법주사와 산내암자가 있어 불교문화 유적의 보고로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문화유적이 산재되어 있다.

6. 산업

국립공원 속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관광서비스업과 상업이 주민의 주산업이 되고 있음.


7. 전설

  • 수정봉 거북바위
    옛날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다가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치었다. 이상히 여긴 태종은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한국) 명산에 큰 거북의 물형이 당나라를 향하여 많은 당나라 재보를 동국으로 들어가려 함이니 사람을 보내어 동국 방방곡곡을 탐색하여 큰 거북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태종은 도사의 말대로 사람을 보내어 사방을 찾다가 마침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돌을 발견하고돌거북의 목을 자로고서도 안심이 안 되어 돌거북 등어리 위에 10층의 석탑을 쌓아서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한다. 그리하여 목은 끊어지고 탑에 눌린 돌거북이 되고 말았다.
  • 걸방바위
    이 바위는 옛날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모집할 때 강원도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설악산 경치에 매료되어 산새를 구경하다가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구성하는데 참여를 못하고 설악산에 머물렀다 하듯이 속리산의 걸방바위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현재의 위치에 와 쉬면서 속리산 경치를 구경하다가 늦어서 속리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전설은 이조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7년간 수도를 할 때 큰 암석을 걸방으로 져서 놓았다 해서 걸방바위라 칭하는데 그 바위에는 걸방끈 자국이 나타나 있다.
  • 목욕소
    속리산 법주사에서 북천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좌, 우 양 옆으로 울창한 노송이 즐비하게 서 있고 사이사이에 절벽과 괴석이 솟아 있는 사이로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 냇물에 10여인이 편히 쉴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웅덩이가있는데 ‘목욕소’라 부른다. 세조는 속리산에서 피부병에 대한 요양도 할 겸 고승들에게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회도 갖도록 하였다. 특히 북천암에는 당시 유명한 학조대사(學祖大師)와 신미(信眉) 학열(學悅)등 법사들이 모여들어 대법회를 열었다. 세조는 법회중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신하를 물리치고 홀로 산책을 하다 이 웅덩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었다. 발이 시리도록 찬 물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맑은 물에 심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목욕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조 앞에 미소년이 나타나더니 “마마 소생은 월광태자올시다. 약사여래(藥師如來-중생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는 부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대왕의 병은 곧 완쾌될 것이니 너무 고심치 마옵소서” 하고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미소년이 서 있던 곳에 커다란 바위가우뚝 솟아 있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시비스러운 일이었으나 세조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였다. 세조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보니 그렇게도 흉측하던 종기는 깨끗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조가 목욕을 하고 병을 고쳤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된 곳이다.
  • 문장대
    세조가 속리산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월광태자(月光太子)라고 지칭하는 귀공자가 꿈에 나타나 동쪽으로 시오리올라가는 곳에 영봉이 있으니 그곳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을 데리고 온 종일 올라가 보니 하늘 위에 오른 것처럼 사방이 구름과 안개 속에 가린 중 영롱한 봉우리가 보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바위라 올라갈 수 없어 철못을 박고 밧줄을 늘여 정상에 올라보니 널따란 반석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세조가 집어 보니 오륜(五倫)과 삼강(三綱)을 명시한 것이라 세조가 크게 감동하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글을 읽으며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그 뒤부터 이 봉을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정상이 언제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는 봉이라 해서 운장대(雲壯臺)라고 불리기도 한다.
  • 배석대
    608년(新羅 眞平王 30년)에 왕비 마야부인(摩耶夫人)과 공주 덕만(德曼-뒤에 善德女王)이 왕자 법승(法昇)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의 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비로봉
    진표율사가 속리산 법주사에 온 이튼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밟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쳤다. 대사가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무지개를 띠고 사방팔방으로 비추공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 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하여 구름을 타고 떠났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산봉우리를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붙여 비로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속리산 지명 유래
    속리산이라는 산명을 얻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藪石記)에 의거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九峰山)이라 불리어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서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76)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주조로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소에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십니까?”하고 물었다 율사는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승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 방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하고 곧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깍아주고 계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시해 두고 다시 명주(溟州 : 지금의 강릉)을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鉢淵藪)를 창건하였다 한다. 이에 진표율가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 속(俗)과 여윌 리(離) 뫼 산(山) 자(字)로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철확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속리산 승려가 해인사의 화장실이 얼마나 큰 지 아침에 뒤를 보면 분뇨가 떨어지는 소리가 이튼날 아침에야 비로소 들린다는 소리를 듣고 구경을 하기 위하여 떠났다가 법주사와 해인사중간 지점인 직지사에 속리산에 쇠솥을 구경하러 오는 해인사 중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해인사 중이 말하기를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쇠솥이 얼마나 큰지 장국을 끓일 때 배를 띄워 노를 젓는다 하니, 얼마나 큽니까?”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소문의 엄청난 거짓을 알고 웃으며 제각기 자기의 절로 돌아왔다고 한다.
  • 신선대
    아득한 옛날 속리산에서 절경에 혼을 빼앗긴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업이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선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지나 신선들과 놀고자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크게 실망하고 아쉬워 하면서 그 자리르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달려갈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추래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수정봉의 산신이 산봉우리를 정리하다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변경하였는지라 괘씸하게 생각하여 “너는 이 수정봉에서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다”하고 산봉우리 밑으로 굴려 버렸는데 그 바위가 현재 위치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하늘나라의 궁전에서 정원사가 돌 사이에 낙엽이 쌓여있으므로 그 낙엽을 걷어내놓고 바위를 옮겨 놓다가 실수를 하여 지구상에 떨어지게 되었고 정원사는 기왕에 떨어질 바에야 명산인 속리산에 떨어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떨어져 내려온 바위라 하여 추래암이라고 한다.

8. 기타

1995년 사내6리에 사내리마을 자랑비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