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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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朝鮮前期)의 보은

<조선의 건국과 보은〉

1. 충청도에의 이속(移屬)과 군명의 개칭

조선왕조 초기 태종 13년(1413)에 고려말(高麗末)의 행정체계에 의하여 경상도 상주(尙州)에 예속되었던 5개의 군현(郡縣) 즉 옥천(沃川)‧보령(保令)‧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이 충청도(忠淸道)에 예속이 되었다.

이후 태종 16년(1416) 8월에 이조(吏曹)의 요청에 의하여, 보령(保令)이 충청도 서해안에 있는 보령(保寧)과 음(音)이 비슷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고 하여, 보은(報恩)으로 개정(改定)되었다. 이때 함경도의 청주(靑州)가 북청(北靑)으로 바뀌고, 강원도 양주(襄州)를 양양(襄陽), 영산(寧山)은 천안(天安), 보성(甫城)은 진보(眞寶), 보주(甫州)는 예천(醴泉), 횡천(橫川)은 횡성(橫城)으로 고친 것과 함께 모두 7개 읍이었다. 이로써 고려시대에 부르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까지 불리우던 보령(保令)은 한날 고호(古號)로 남고 새로이 보은(報恩)이라 칭하게 되었다.


2. 세종대(世宗代)의 보은(報恩)‧회인(懷仁)

세종대에는 조선왕조의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어가던 시기이며, 민본사상(民本思想)에 의거하여 생산력(生産力)이 증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보은지역이 충청도 청주(淸州)로 이속(移屬)되므로서, 충청도‧경상도의 경계를 이루었던 지역 구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변화는 언어‧습속‧생활권에 이르기까지 점차 변화하여 충청도의 기질로 바뀌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중앙집권체제하의 보은‧회인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파악된 형편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보은현은 호(戶)가 327, 구(口)가 1,457로부터 612호(戶)이상으로 증가하였거나. 국역(國役)에 편성된 호구(戶口)와 실제로 존재하던 호구와 차이가 있다. 회인(懷仁)은 호(戶)146, 구(口)633으로 나타나 있다.
② 군역(軍役)에 편성된 사람들의 숫자는 보은의 경우 시위군(侍衛軍) 64, 수성군(守城軍) 1, 선군(船軍) 136명이고 회인은 시위군 12, 진군(鎭軍) 18, 선군 37명으로 군정(軍丁)에 모두 268명이 소속되었다.
③ 당시 호구(戶口)와 관련하여 토착(土着)의 성씨로는 보은의 경우 이(李)‧최(崔)‧김(金)의 3개와 임언부곡(林偃部曲)의 홍(洪)‧석(石)등 모두 5개 성씨이고, 회인은 토성(土姓)이 이(李)‧홍(洪)의 2개 성씨가 있다.
④ 회인은 토지가 척박하고 기온이 춥다고 하고, 보은은 토질이 척박하나 5곡의 재배가 적당하다고 하여 산악지대임을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보은이 보다 농업에 적당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에 생산되던 농산물은 보은고 회인에서 공통적인 것으로는 조‧팥‧교맥(蕎麥)‧배‧뽕나무‧닥나무이며, 보은의 경우와 달리 회인에서는 기장‧피‧콩‧보리가 있어 보다 잡곡위주의 농사임으 보여준다. 간전(墾田)은 보은이 5,229결(結)로 이 가운데 논이 1/3이 넘는데 비하여, 회인은 1,146결 가운데 논의 비율이 1/9에 불과하였다.
⑤ 토산물은 보은의 송이(松栮)‧신감초(辛甘草) 및 은석(銀石)이고, 회인의 석철(石鐵)‧상수정석(常水精石)이 알려져 있다.
⑥ 국가에 현물(現物)로 납입하는 공물(貢物)은 보은의 경우 벌꿀‧황밀과 버섯‧대추‧호도‧송자(松子) 등을 비롯하여 칠‧지초와 짐승 가죽으로 다양하나, 회인은 단순하였다. 약재로는 회인의 백부자(白附子) 하나에 비하여 보은은 연꽃술‧인삼‧오가피‧백복령‧당귀‧위령선‧안식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⑦ 각 고을에 도기소(陶器所)가 있어 그릇을 생산하였는데, 보은은 외임리(外任里)였고 회인은 둔안리(芚安里)에서 생산했는데 품질은 모두 하품(下品)에 속하였다.
⑧ 봉수로(烽燧路)는 고려시대의 것을 이용하여 금적산(金積山)에서 청산(靑山)의 박달라산(朴達羅山) 봉화를 받아 북(北)으로 회인의 용산참(龍山站)을 거쳐 청주(淸州) 상령성(上嶺城)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⑨ 보은의 오정산석성(烏頂山石城)은 아직도 유사시에 대비하는 중요한 입보처(入保處)로서 군창(軍倉)이 설치되어 있었고, 회인의 호참산석성(虎站山石城)도 입보용(入保用)의 산성(山城)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⑩ 당시 두 고을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은 육로(陸路)로 아산만(牙山灣)에 이르러 다시 해로(海路)로 운송하였다. 15세기 중엽부터는 충주(忠州)에 이르러 강선(江船)으로 운반하게 되었다.
⑪ 주요한 관도(官道)는 역(驛)이 보은현 경내의 원암(元巖)과 함림역(含林驛)이 있었으므로 청주~보은~청산을 경유하는 통로가 간선(幹線)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⑫ 월경지(越境地)가 있고, 특수한 행정구역이 아직도 존재하였다. 월경지는 공물의 배정과도 관계가 있는 곳으로 청산현(靑山縣)에 소속된 주성부곡(酒城部曲)이 있었다. 부곡은 임언부곡(林偃部曲 : 현 임한리 주변)이 있었는데, 차츰 직촌화(直村化)되어 갔다.


3. 15세기 후반의 보은‧회인

문종(文宗)이 즉위한 1450년으로부터 연산군(燕山君)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서는 세조의 속리산(俗離山)행차와 복천사(福泉寺) 경영을 비롯하여 이 고장이 한때 주목을 받기도 하였고, 조선왕조 초기의 제도‧문물이 갖추어지면서 장차 이고장에도 문풍(文風)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 시기였다.

문종(文宗)이 세종(世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승(僧) 신미(信眉)는 속리산에 복천사(福泉寺)를 개창하고 있었는데, 왕은 이때 감사(監司) 권극화(權克和)에게 단청하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 당시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사풍(士風)에 의하여 커다란 정치적 문제로 조야(朝野)가 떠들석하였다.

1470년(성종원년)에 이르러 군액(軍額)이 경정(更定)되었는데, 이때 보은은 본디 688명이었다가 650명으로 되고, 회인은 188명에서 150명으로 조정되었다. 그후 성종3년에는 다시 보은이 580명, 회인은 100명으로 조정되었다. 이들 군사(軍士)들이 중앙군(中央軍)에 있어서는 오위(五衛) 가운데 중위(中衛)에 해당되는 의흥위(義興衛)에 소속되었다. 위(衛)에는 중(中)‧좌(左)‧우(右)‧전(前)‧후(後)의 5부(部)로 구성되었는데, 보은‧회인은 청주진관(淸州鎭管)이므로 전부(前部)에 소속되었다.

15세기 후반에 보은지방에는 문풍(文風)이 높아지게 되는데 강원감사(江原監司)까지 지낸 한유문(韓有紋)이 보은땅에 살게 되었고,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낸 김타(金沱)가 살면서 유교적 소양에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윽고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서는 사천(私踐)신분인 막동(莫同)이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니, 이때 충청도가 타도에 비교하여 향약(鄕約)이 잘 시행된다고 하고, 김정(金淨)과 같은 사림(士林)이 등장하여 새로운 기운으로 훈구파(勳舊派)에 대해 비판적 자세로 위민정치(爲民政治)르 주도하게 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훈구대신이던 홍윤성(洪允成)은 회인사람이었다. 회인에서도 유풍(儒風)이 일어나 이우(李祐)와 같은 효자가 나타나기도 하였던 것이다.


4. 세조(世祖)의 속리산(俗離山) 행행(幸行)

세조(世祖) 9년(1464) 12월 왕은 정현조(鄭顯祖)와 김개(金漑)로 하여금 온양온정(溫陽溫井)의 행궁(行宮)을 돌아보고 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음달인 1465년 봄에 행행(幸行)키 위한 일이었다. 2월에 이르러 도성에 머물며 지킬 사람들을 임명하고 왕과 중궁(中宮)이 온양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광주(廣州) 문현산(門縣山)에 이르러 사냥하는 구경을 하고, 죽산(竹山) 연방(蓮坊)과 진천(鎭川) 광석(廣石)을 거쳐 청주(淸州) 초수(椒水)(현재의 초정약수)에 이르르게 되었다. 이러한 거동을 보아 당초 온양온정(溫陽溫井)에 간다는 것은 일종의 암행(暗行)을 위한 풍문에 불과하였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세조의 순행은 날자별로 살펴보면,
*병오(丙午)일 : 청주에 도착 노인(老人)‧유생(儒生)‧창기(娼妓)들이 가요(歌謠)를 받침. 노인(老人)들에게 주육(酒肉)을 내림.
*기유(己酉)일 : 청주에서 출발하여 저녁에 회인에 도착. (이때 피반령(皮盤嶺)을 넘어감)
*경술(庚戌)일 : 보은현 동헌(東軒)을 지나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도착했다. 병풍송(屛風松)이 지금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이다. 이때 승려(僧侶) 신미(信眉)가 배알하고 떡 150쟁반을 바치니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신해(辛亥)일 : 속리사(俗離寺)에 행차하고, 또 복천사(福泉寺)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지금의 福泉庵)에는 쌀 300석, 노비 30명, 토지 200결을 하사하고, 속리사(지금의 法住寺)에는 쌀과 콩 30석을 하사한 다음 행궁(行宮)에 돌아왔다.
이러한 실록(實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이 곳의 행차와 관계되는 흔적으로 훗날 많은 일화와 얘깃거리로 남아있게 되었다. 특히 정이품송(正二品松)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조선전기의 문화와 보은〉

1. 사림(士林)의 성장과 보은

세종대(世宗代)부터 왕조(王朝)가 안정되어 학문을 장려하고, 다시 성종대(成宗代)에 이르러 문운(文運)이 크게 일어나는 사회 분위기에 따라 지방에 은거(隱居)하였던 유학자(儒學者)들이 차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회인을 본관으로 한 홍윤성(洪允成)이 세조(世祖)를 도와 훈구대신(勳舊大臣)이 된 것과는 달리 보은에 있어서는 보은을 본관으로 한 김태암(金泰岩)과 경주김씨인 김정(金淨), 강릉최씨인 최수성(崔壽峸), 능성구씨인 구수복(具壽福) 등에 의해 싹이 트게되었다.

김태암(1477~1554)과 김정(1486~1521), 구수복(1491~1545)과 그 아우 구수담(1500~1550), 최수성(1487~1521) 등이 그들로서 모두 중종(中宗) 14(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와 관계가 깊은 인물들이다.

이중 김정(金淨)은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나 연산군(燕山君) 5년 14세때 별시초시(別試初試)에 장원하고 회덕(懷德)의 법천사(法泉寺)에서 공부하고 5년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그후 중종원년에 고봉정사(孤峯精舍)에서 최수성‧구수복 등과 함께 강학(講學)하니 지금의 삼현정(三賢亭)터가 이들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듬해에 별시갑과(別試甲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신진기예(新進氣銳)로서 당시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서 호당(湖堂)에 뽑이면서 밖에서는 박상(朴祥)과 소세양(蘇世讓)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중종 9년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이듬해는 담양부사(潭陽符使)인 박상(朴祥)과 신비(愼妃) 복위가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려 당시 집정대신(執政大臣)들의 잘못을 공격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함림역(含林驛)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이때 조광조(趙光祖)의 신구(伸救)와 왕의 허락으로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간절한 왕명으로 부제학(副堤學)이 되고 김굉필(金宏弼)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조광조와 함께 주장하기도 하고 향약(鄕約)을 시행하는 등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고자 애쓰게 되었다.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면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건의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정치를 건의하다가 드디어 훈구세력(勳舊勢力)의 구화(構禍)에 의해 사림세력(士林勢力)이 큰 화(禍)를 당하는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1519년 11월에 곤장을 맞고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는데, 가까운 곳에 계신 모친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금산군수(錦山郡守) 정웅(鄭熊)에게 얘기하고 잠시 어머니를 뵙고 오던 중, 진도(珍島)로 유배처를 옮기려고 온 도사(都事) 황세헌(黃世獻)을 따라 다시 진도(珍島)로 다시 제주(濟州)로 옮겨가게 되었다. 거기서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짓는 등 보내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후 그를 추모하는 지방의 사림(士林)들에 의해 서원(書院)이 세워지고 사림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크게 숭앙의 대상이 되고 호서사림(湖西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활동하던 최수성(崔壽峸)은 기묘사화로 과거를 포기하였으나 2년 뒤의 신사무옥(辛巳誣獄)에서 역시 사형을 받았으며, 구수복(具壽福)은 기묘년에 삭직(削職)되고, 1533년 이준경(李浚慶)과 동생 수담(壽聃)의 노력으로 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복직된 후 죽어갔고 김태암(金泰岩)은 삭직(削職)된 뒤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후 보은지방은 이들 초기의 사림(士林)과 그들과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사림들이 맥을 이었으니, 조헌(趙憲)과 성운(成運)의 영도하에 많은 사림들이 있었으나, 1592년의 왜란(倭亂)으로 충성심을 불태우며 의병(義兵)에 가담하여 대외적 민족항쟁(民族抗爭)의 대열이 이루어진 것도 사림의 성장과 그 의식의 계승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2. 상현서원의 창건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보은지역에는 앞서 김정(金淨)등에 의해 뿌려진 성리학의 씨앗이 움터서 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 등이 사림(士林)의 전통을 이어갔다. 성운(成運)은 보은 북실 종곡(鐘谷)에 은거하여 속세에 나오지 않았고, 성제원(成悌元)은 공주(公州)에서 태어나 후일 보은현감을 지냈다.

명종(明宗)은 학문을 사랑하고 초야(草野)에 숨은 선비들을 많이 등용하였는데, 명종 7년(1552)에 전국에서 명망높은 선비를 추천토록 하였다. 이듬해 5월 성제원(成悌元)을 으뜸으로 성수침(成守琛)‧조식(曺植)‧이희안(李希顔)‧조욱(趙昱) 등 5명이 육조구비(六條具備)의 인물로 추천되었다. 육조(六條)란 경명(經明)‧행수(行修)‧순정(純正)‧근근(勤謹)‧노성(老成)‧온화(溫和)로 유학자로서의 언행(言行)과 교양(敎養)을 갖춘 모범인물이었다. 성제원은 보은현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첫 번이자 마지막 벼슬인 보은현감을 맡아서는 술을 마셔가며 일을 보았으나 교활한 향리(鄕吏)들이 무서워하였으며, 간사한 백성들도 도덕(道德)에 복종하여 치적(治積)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보은에 있으면서 성운(成運)이나 조식(曺植)과 함께 당시 사림(士林)을 대표하는 의리있는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으므로, 그후 향사당(鄕祠堂)에 배향(配享)되었다.

성운(成運)은 보은 종곡에 은거하여 있다가 1566년(명종 21) 5월에 육조구비지인(六條具備之人)으로 천거되었다. 그는 처음엔 명문가의 아들답게 부모의 뜻에 따라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과거에 뜻을 버리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려고 처가(妻家)로 내려온 것이었다. 보은에 와서 산천과 경치를 사랑하여 가야금과 책과 술과 시를 벗삼아, 오직 의리가 있는 사람과 어울리니 사람들이 모두 진솔한 학자로 추앙하였다. 왕의 부름에도 끝내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인재를 등용하고자 특별한 부름을 했을 때 경상도의 이항(李恒)과 충청도의 성운(成運)이 그 대상이었으니, 당시 충청도를 대표하는 학자였던 셈이다. 성제원과 조식이 가장 친한 친구였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보은에는 인재가 몰려들었으니, 후일 의병활동을 한 조헌(趙憲)이 1582년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보은현감이 된 것도 그 하나였다. 그는 율곡 이이(李珥)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은현감을 지내면서 정사를 잘 돌보았으며, 이어 옥천 안내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후생을 가르쳤다. 김정‧성제원‧성운의 뒤를 이어 이지방 사림의 구심점이 된 것이다. 이지방에 살면서 사림의 대표가 된 김정과 성운은 삼년성서원(三年城書院)이란 사우(祠宇)에 봉사(奉祠)되었고 보은현감을 지낸 성제원과 조헌은 향사당(鄕祠堂)에 배향(配享)되었다가 1681(숙종7)년에 이르러 네분 모두가 상현서원에 합사(合祠)되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후기에는 상현서원이 이지방 사림의 근거지로 성리학의 맥을 잇는 사림문화(士林文化)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1592년에 미증유(未曾有)의 왜침(倭侵)이 일어나 삽시간에 국토가 유린당하게 되자, 조헌은 수하의 제자들과 이웃의 백성들에게 왜적을 토벌하기 위한 의병(義兵)에 참여하도록 의(義)로써 고(告)하고 일어서게 되었다.



〈외침(外侵)의 극복과 보은〉

1. 왜란(倭亂)‧호란(胡亂)을 겪은 보은

1592(선조25)년 4월에 왜(倭)의 침입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조선왕조의 실정으로 대규모 침략에 대해 중도에서 막을 수가 없었다. 왜는 주력군을 조령로(鳥嶺路)로 하고, 죽령로(竹嶺路)과 추풍령로(秋風嶺路)로 북상하였다. 이 가운데 추풍령로는 황간‧영동‧옥천을 거쳐 북상하였으므로 보은도 이러한 길목으로 전략상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게 되었다.

그해 6월에는 왜가 성주(星州) 무계현(茂溪懸)에서 금산(金山)‧지례(知禮)를 지나 무주(茂朱)‧용담(龍潭)을 지나 금산에 둔치고, 다시 옥천‧영동을 분탕하여 청주에 둔거(屯據)하여 노략질을 하게 되었다. 조헌은 이미 5월부터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도 지방에서는 그 첫 의병모집에 나섰던 것인데 6월에는 김절(金節)‧박충검(朴忠檢) 등을 비롯하여 전승업(全承業)등을 중심으로 수백명이 보은의 차령(車嶺)에서 왜와 부딪쳐서 격퇴시키는 향토방위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6월 12일경에는 호서지방 뿐만 아니라 영남지방에까지 의병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었으나, 관군(官軍)과의 관계가 여의치 못하였다.

드디어 문생(門生)을 중심으로 1,600여명의 의병은 7월 4일 웅진용당(熊津龍當)에서 제(祭)를 올리고 의기(義旗)를 세웠다. 의병장은 조헌이었고, 이광윤(李光輪)과 정민수(鄭民秀)가 수백명씩 모집한 의병을 이끌고 참모가 되었으며, 구항(具恒)은 참모로 군수(軍需)를 조달하였다. 이밖에도 부서를 정하여 본격적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해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한 전투에 참여케 되었다. 청주성을 탈환한 의병은 이어서 금산(錦山)에 둔치고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공격하다가 700의사가 장렬히 전사하였던 것이다.

당시 보은지역은 속리산의 험준함으로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1593년까지의 피해를 입은 고을에 보은이 포함된 것을 보면, 보은에 왜가 분탕질을 하자 읍내일원의 주민들은 주변의 피난처로 피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회인은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은 고을이었다. 이는 보은이 상주에서 청주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으로 왜군이 점령하여 주둔하였지만, 적은 병력으로 보급로의 일부를 지키는 수준이었다.

1597년에 왜가 다시 침입하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일시 왜군은 청주‧공주를 거쳐 북상하였다가 다시 남하하게 되었다. 이때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의 보고에는 금강을 건너는 형강(荊江)에서 명군(明軍)이 왜를 쳐부셨으나, 보은에는 왜가 가득차게 둔진(屯陳)하였다고 하였고, 병사 소속의 장졸(將卒)들도 숲이 우거진 산속에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해 9월의 경우 호서일도(湖西一道)는 새로 병화(兵火)를 입어 살고있는 백성이 죽어가니 10중 한둘도 안되어 들판에 벼가 있어도 수확할 사람이 없다고 과장되게 표현되고 있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 당시의 현감으로는 1605년의 신수기(申守淇)와 교대된 이인기(李麟奇)가 기록에 보일 뿐이다.

왜란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듯하다가 이제는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이 강성해져서 위협이 되었다. 정부는 광해군대(光海君代)에는 명(明)에 대하여 사대(事大)의 예(禮)를 다하면서도 후금(後金)의 세력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말미암아 서인정권(西人政權)이 성립되자 외교정책에 있어 숭명사대(崇明事大)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전국에 걸쳐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결국 청(淸)에 굴복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9년 (광해원년) 3월에 회덕(懷德)에 살던 진사(進士) 이시직(李時稷)등이 김정(金淨)을 모신 삼년성서원(三年城書院)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상현서원(象賢書院)의 액(額)이 내려지고, 이어 노응탁(盧應晫)이 상소하여 조헌(趙憲)을 모신 사우(祠宇)에도 사액(賜額)을 내릴 것을 요청하자 표충사(表忠祠) 액(額)이 내려지는 등 란후(亂後)의 처리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즈음인 1611년 2월에는 폐읍지경이였던 회인현이 복설(復設)되었다.

인조대(仁祖代)에 이르러서는 1625년 보은현감은 서운준(徐雲駿)의 임명기사가 보이고, 1628년 5월에는 보은에 새알만큼 크기의 우박이 내렸는가하면, 8월에는 서리가 일찍 내렸다고 하였다. 1635년 (인조13) 2월에는 법주사의 장육불(丈六佛)이 땀을 흘리는 이변이 있었고, 1637년에는 회인에 큰 장마가 나고, 1647년과 이듬해에는 금강이 범람하는 장마가 있어 집중호우가 퍼붓는 바람에 농작물에 큰 피해가 나고 산이 무너져 내리며, 비바람이 불어 큰 피해가 있었으니, 이때 태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대에 이르러서 속리산의 법주사는 대대적인 중창(重創)을 보게되는데, 인조2(1624)년에 팔상전(捌相殿)을 비롯하여 이후 대웅전(大雄殿)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졌다. 이러한 법주사를 중심한 불교의 중흥은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명실상부한 「호서제일가람」으로서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