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남면
- 거교리
- 금곡리
- 남대문리
- 매산리
- 법수리
- 분저리
- 사음리
- 사탄리
- 산수리
- 서탄리
- 송포리
- 신곡리
- 신추리
- 어성리
- 용호리
- 은운리
- 조곡리
- 판장리
회남면(懷南面)
1. 위치
면적 49.61㎢, 인구 379가구 941명(1999년말). 군의 남서부에 위치하여 동은 수한면(水汗面), 서는 청원군(淸原郡) 문의면(文義面), 남은 옥천군(沃川郡) 안내면(安內面)과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북은 회북면(懷北面)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지역으로서 읍내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면(南面)이라 하여 상추(上楸), 하추(下楸), 금곡(金谷), 지승(地承), 조곡(鳥谷), 판장(板藏), 사담(沙潭), 탕산(宕山), 영승(永承), 풍계(楓溪), 용호(龍湖), 분저곡(分諸谷), 송포(松浦), 검탄(儉灘), 서당평(書堂坪)의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동면(東面)의 언목(彦目), 지경(地境), 광성(光城), 노성(老城)의 4개리와 강외면(江外面)의 사음(舍音), 매산(梅山), 산수(山水), 행정(杏亭), 법수(法水)의 5개리와 서면(西面)의 거교(巨橋), 염티(鹽峙), 어성(漁城), 남대문(南大門), 만지(晩旨), 거구(巨九), 후곡(後谷), 신읍(新邑), 양중지(陽中旨)의 9개 동리와 옥천군 북일소면(北一所面)의 대촌(大村), 안내면의 용촌리(龍村里)와 문의군(文義郡) 주안면(周岸面)의 오동령(梧桐領) 하창(下倉)의 2개 리를 병합하여 회인군을 남북으로 나누는데 남쪽이 되므로 회남면이라 하고 신추(新秋), 금곡, 조곡, 판장, 용호, 분저, 사담, 송포, 서탄(書灘), 은운(隱雲), 노성, 사음, 매산, 산수, 거교, 염티, 어성, 남대문 신곡(新谷), 법수의 20개 리로 개편하고 조곡리를 면소재지로 하였다. 뒤에 면사무소를 신곡리로 이전하였다가 1980년 대청댐 건설에 따라 거교리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1987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의거 노성리를 수한면에 넘겨주고 19개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염티리를 청원군 문의면에 넘겨주어 현재 18개 리로 편성되어 있다.
3. 자연
회북면과의 경계에 국사봉(國師峰:552m)를 위시하여 500m 내외의 산지가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금강에 접하고 동남부에 흐르는 금강 본류는 굴곡이 심한 사행을 이루고 있다. 회인천이 북에서 계속 면의 중앙을 통과 남류하면서 금강에 들어가 유역에 충적평야를 이루었으나 대청댐 담수로 모두 수몰되고 높은 지역만 남아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4. 산업
논 0.68㎢, 밭 3.43㎢, 임야 30.20㎢. 본면은 작은 경지에 마늘, 감, 은행, 담배, 땅콩의 재배가 성하고 대청댐 주위에 서비스업과 어업에 종사자가 많다.
5. 교육・문화
대전~회북면을 잇는 지방도 571호선이 면의 중앙을 통과하여 남대문에서 지방도 509호선이 발기하여 문의와 연결되고 있다. 회남교, 남대문교, 거신교 등이 대청호 위에 건설되어 있고 보은, 청주, 대전방면의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문화재로는 금곡리에 이상수(이상수)와 그의 제자들이 위패를 봉안한 추양사(秋陽祠)와 조곡리에 마전사지(麻田寺址) 그리고 남대문리에 호점산성(虎岾山城)과 양달해(梁達海)와 그의 아내 김씨의 효와 열을 기리기 위한 정문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거교리(巨橋里)
1. 위치
면적 1.78㎢, 인구 68가구 176명(1999년말). 면의 북부이나 면 소재지로 동은 금곡리(金谷里), 서는 남대문리(南大門里), 남은 신곡리(新谷里), 북은 회북면(懷北面)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큰다리가 있었으므로 것더리 또는 거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면(南面)의 사담리(沙潭里)일부를 병합하여 거교리라 해서 회남면(懷南面)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므로 고지대로 마을을 이전하고 회남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3. 자연마을
- 것-더리(더리)[마을] 거교리의 으뜸되는 마을. 마을 앞에 큰 다리가 있었다고 함. 거교1리 마을임.
- 멱-골[마을] 것더리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전에 마을 앞 회인천에서 목욕을 많이 하였다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본-말(本村) [마을] 것더리 서남쪽 사당마루 입구에 있었던 마을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사당-마루(沙潭)[마을] 것더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본래 본말은 회인턴 변에 있었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됐기 때문에 마을 뒷산으로 이전하였음. 예전에 사당이 있어 사당마루라 불렀음. 거교 2리로 면사무소, 초등학교, 우체국, 농협분소 등이 위치한 마을임. ‘날망’이라고도 부르고 있음.
4. 기타지명
- 거신-교(巨新橋)[다리] 사당마루와 조곡리를 연결하는 대청호에 있는 다리. 길이 80m, 폭 12m, 1980년에 건설되었다.
- 것더리-앞들[들] 것더리 앞에 있는 들.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고 일부만 남았음.
- 꽃밭-이마[산]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산.
- 농-골[골] 것더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논이 많아 ‘논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농골’이 되었음.
- 독점-골[골] 사당마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옹기점이 있었다 함.
- 땀띠기-샘[우물] 것더리 북쪽에 농골 안에 있는 샘. 물이 차서 여름에 땀띠가 난 사람이 이 물로 씻으면 낫는다고 함.
- 병목-안[안] 것더리 서북쪽에 잇는 산, 오봉산(오봉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호점산성 남쪽에 있음.
- 분두개울[산] 것더리 서쪽에 있는 산. 높이 204m.
- 산지당-구렁[골]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산제당이 있음.
- 삼박-골[골] 것더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삼(삼)을 재배하던 밭이 있었다 함.
- 서당-골(書堂谷)[골]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오봉산 밑에 있음.
- 성-밑(城底)[산]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산. 오봉산 성밑에 있음.
- 성밑-골[골]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오봉산까지 이어짐.
- 쇠꼿-재[산]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산.
- 아래-농골고개[고개] 것더리에서 농골로 넘어가는 고개.
- 안-터[들] 것더리 앞에 있는 들.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고 일부만 남아 있음.
- 여구술-양지[산]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산. 양지쪽에 있으며 여우굴이 있다고 함.
- 오봉-산(五峯山)[산]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산. 호점산성 남쪽에 있으며 봉우리가 다섯 개임.
- 위-농골고개[고개] 것더리에서 농골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 농골 고개 위에 있음.
- 임금-바우[바위] 것더리 동쪽 회인천가에 잇던 바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갈수기에는 볼 수 있다.
- 자롱-고개[고개] 것더리에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을 잘라서 만든 고개로 ‘자른고개’가 변하여 ‘자롱고개’가 되었음.
- 작은-구렁[골]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오봉산 밑에 있음.
- 청룡-산(靑龍山)[산] 것더리 왼쪽으로 뻗어나온 등성이.
- 큰-구렁[골] 것더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오봉산 밑에 있음.
5. 문화유적
- 청주한공철수효행기념비(淸州韓公哲洙孝行記念碑)
것더리 입구에 있는 효자 한철수의 비로 1954년 12월 4일 세움.
- 전면장남원양공기석송덕비(前面長南原梁公箕錫頌德碑)
1961년회남초등학교 입구에 세웠던 비로 대청댐 담수로 학교와 함께 1980년에 이전하였음.
- 국회의원관성육공인수송덕비(國會議員管城陸公寅修頌德碑)
1968년 신곡리 회남초등학교 입구에 세웠던 비로 1980년 대청댐 담수로 학교와 함께 이전되었음.
6. 산업
고추, 잡곡, 마늘
금곡리(金谷里)
1. 위치
면적 2.02㎢, 인구 40가구 88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2.2㎞ 지점인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회북면(懷北面), 서는 거교리(巨橋里), 남은 조곡리(鳥谷里), 북은 신추리(新秋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쇠가 많이 났으므로 쇠실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승동(地承洞)을 병합하여 금곡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깨박-골[마을] 쇠실 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깨를 많이 갈았다고 함.
- 느트-정[마을] 쇠실 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다고 함.
- 쇠-실(金谷)[마을] 금곡리의 중심마을. 국사봉에서 파낸 쇠를 이곳에서 구워냈다고 함.
- 스승-골(師谷里. 地承洞 )[마을] 쇠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 이 곳에 절이 있었으며 중이 많았다고 함.
- 양지-뜸[마을] 쇠실 통뫼산소를 중심으로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웃-말[마을] 쇠실 중앙 네거리를 중심으로 위쪽에 있는 마을.
- 음지-뜸[마을] 쇠실 통뫼 산소를 중심으로 음지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가래울-고개(楸領)[고개] 쇠실에서 신추리로 넘어가는 고개.
- 고개-밑[골] 쇠실에서 신추리로 넘어가는 골짜기. 가래울고개 아래가 됨.
- 국사-봉(國師峰:552m)[산] 금곡리 동쪽에 있는 산. 회북면과의 경계에 있으며 정상에 돌무더기가 있음. 옛회인현의 명산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산의 정상은 큰 명당자리라하여 조상의 묘를 만들면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귀하게 되나 그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고 그 가물은 파묘하고 기우제를 지내야만 비가 온다고 함. 이와 같은 설에 따라 가문의 번성과 부귀를 노려 조상의 묘를 만들려는 사람과 가뭄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분쟁이 여러번 있었다고 함.
- 느트정-골[골] 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다고 함.
- 돼지-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웃말 위쪽에 있으며 옛날 산돼지가 많았다 함.
- 두루-봉[산] 아랫말 뒤에 있는 산. 산봉우리가 밋밋하고 동글게 생겼음.
- 뒷-날[등] 쇠실 동쪽에 있는 등성이. 국사봉의 한 줄기임.
- 마당-재[산] 쇠실 동북쪽에 있는 산. 마당처럼 편편함.
- 막은-골[골] 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물건너 거교리에서 바라보면 골짜기 안을 꽉 막은 것처럼 보인다고 함.
- 매봉-재[산] 쇠실 동남쪽에 있는 산. 이 곳에서 매 사냥을 많이 했다고 함.
- 문층묏-날[산] 쇠실 남쪽에 있는 산. 문층의 묘가 있다 함.
- 뭉치미-날[산] 쇠실 남쪽에 있는 산
- 배나무-골[골] 쇠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수백년 묵은 배나무가 있다고 함.
- 불당-골[골] 쇠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다 함.
- 삼박-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서고개-골[골] 스승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스승골에서 쇠실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음.
- 서낭댕이-고개[고개] 쇠실에서 스승골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었음.
- 스승-골(師谷)[골] 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스승골 마을이 있음.
- 승곡-교(承谷橋)[다리] 스승골 서쪽에 있는 철근콘크리트다리. 1980년에 가설 되었음.
- 안산넘어-골[골] 스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우담탁-골[골] 쇠실 양지뜸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우담이라는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함.
- 음지뜸-도랑[내] 국사봉에서 쇠실 음지뜸으로 흘러 내리는 개울.
- 작은-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중-뫼(中山)[산] 쇠실 양지뜸 북쪽에 있는 산. 높이 232m. 옛 회인현 고을 중심에 있다하여 ‘중뫼’라 불렀다고 함.
- 큰-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통뫼-산소[묘] 쇠실입구에 있는 묘.
- 푯대-날망[산] 쇠실 북쪽에 있는 중뫼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일제시대 세부측량시 푯대를 꽂았다고 함.
5. 문화유적
- 추양정사(秋陽精舍)
금곡리 마을 입구에 있는 어당(峿當) 이상수(李象秀)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 본래 1911년 어당의 제자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가 스승의 옛 집터인 신추리에 건립하고 스승의 영정을 봉안하였다가 뒤에 박문호, 양주승(梁柱承), 양주학(梁柱學), 박용호(朴龍鎬), 박순행(朴洵行), 양주하(梁柱河)의 영정을 추가로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다가 1995년 3월 이 곳에 정면 3칸, 측면 1칸 홀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 집을 신축하고 영정을 이전 봉안하였다. 정면에 “秋梁精舍”라 편액하고 앞에 일각문이 있다. 주위는 시멘트 담장으로 둘렀다.
- 송석정(松石亭)
금화(金華) 양주승(梁柱承)이 마을앞에 세운 정자로 여름철에 문인들과 시를 읊으로 피서하며 즐겼던 곳이였으나 건물은 없어졌다.
- 남면장양종환송덕비(南面長梁宗煥頌德碑)
회인군 남면장 양종환 송덕비로 1890년에 세움.
- 효열부영산신씨소성여사기적비(孝烈婦靈山辛氏小成女史紀蹟碑)
양주화(梁柱華)의 처 신소성(辛小成 1868~1951)여사의 효와 열을 기리는 비로 1992년 5월 10일 건립되었다.
6. 집성
- 집성남원양씨(南原梁氏)
남원군(南原君) 성지(誠之)의 후예로 20여호가 거주하고 있음.
7. 산업
고추, 마을, 잡곡.
8. 전설
- 국사봉 돌무더기
이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그 산 정산부근은 굉장한 명당자리라 한다.
옛날 이 명당에 묘를 만들면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귀하게 된다고는 하나 그 산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고, 그 가뭄은 묘를 파내어 기우제를 지내야만 비가 온다는 말하자면 이율배반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 산으로 집안의 번성과 부귀를 노리고 이 산에 조상의 산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과 가뭄을 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여러번 있는 산이기도 하다.
o옛날 고려 때 지금의 회남면 금곡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외딴집에 어느 과부가 두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부의 두 남매는 얼마나 용맹스럽고 날렵한지 몰랐다. 그뿐 아니라, 두 남매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 비록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사는 과부지만, 두 남매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 비록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사는 과부지만 두 남매만 보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부에게는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밤마다, 이 산의 신령이 나타나서는 남매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신령이 나타났다. 신령은 매우 노하였고 큰 호령으로 꾸짖기 시작하였다. “남매가 너무 비범해 둘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천기를 다스릴 수 없을 터인즉 더 이상 주저하면 하늘의 노여움이 크리라”는 것이었다. 과부는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남매를 앞에 앉혀 두고 어려운 내기를 시켰다. 내기에서 지는 똑은 희생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과부는 아들에게 나막신을 신고 당나귀를 끌고 하루 아침에 서울을 다녀오고 딸에게는 앞치마로 돌을 날라 10리 밖에 있는 매곡산에 성을 쌓도록 하였다. 이제 딸은 한번만 앞치마에 돌을 가지고가 성을 쌓으면 다 쌓게 되는데 아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내기에서 아들이 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나라 어머니들의 생각인지라 과부는 딸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과부는 딸의 앞치마를 딸이 알지 못하도록 찢어놓았다. 딸은 자기보다 더 큰 돌을 굴리고 성을 쌓느라고 손바닥에 피가 흐르고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오빠에게 질세라 열심히 돌을 주어 앞치마에 담았다. 그리고 매곡산을 향하여 가려하자, 돌이 우그르 쏟아졌다. 어머니가 앞치마를 찢어 놓은 것을 모르는 딸은 쏟아진 돌을 다시 주워담았고 걸음을 옮기려면 돌이 쏟아지고 그렇게 하는 중에 아들이 돌아왔고 내기에 진 딸을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산정에 있는 돌무더기는 바로 딸이 쏟아논 돌들이었다.
9. 기타
1991년 10월 6일 마을 입구 도로변에 유래 자랑비를 건립.
남대문리(南大門里)
1. 위치
면적 5.30㎢, 인구 39가구 105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85㎞ 지점인 면의 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거교리(巨橋里), 서는 청원군(淸原君) 문의면(文義面), 남은 어성리(漁城里), 북은 회북면(懷北面)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호점산성의 남문 밖이 되므로 남대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동(晩旨洞), 거구리(巨九里)와 후곡리(後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남대문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거쿠-리(巨九里)[마을] 남대문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아홉사람의 부자가 세력을 피며 살았다고 함.
- 남대-문(南大門)[마을] 남대문리의 중심마을. 호점산성의 남문밖이라고 함.
- 만-마루(晩旨洞)[마을]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마을. 고려때 최영장군이 이곳에서 만지창을 만들었다 함.
4. 기타지명
- 가마-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가마-성(성터)[성] 남대문 북쪽에 있음. 골 전체를 성을 쌓았다하여 붙여진 이름.
- 남대문-교(南大門橋)[다리] 남대문리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 길이 150m, 폭 10m의 철근콩크리트 다리. 1980년 12월에 완공되었음.
- 남-문(南門)[문] 남대문에 있는 문. 가마성의 남문이 됨.
- 논-골[골] 거쿠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효자정문이 있음.
- 느저목-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돼지-골[골] 만마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뒤견-봉[산] 거쿠리 동쪽에 있는 산. 두견새가 잘 운다고 함.
- 만마루-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만마루까지 이어짐.
- 말-바탕[버덩] 최영 장군이 말 달리기를 연습하던 곳이라 함.
- 먹-뱅이[골] 거쿠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멀티-고개[고개] 거쿠리에서 어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 모악-골[골] 거쿠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모막-산(墓幕山:155m)[산] 거쿠리 남쪽에 있는 산
- 바사리-고개[고개] 거쿠리에서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로 넘어가는 고개. 먹뱅이골 끝에 있음.
- 배나무-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가마골 위에 있음.
- 불무-골[골] 거쿠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불무골-고래[고래] 거쿠리에서 신곡리 뒷골로 넘어가는 고개.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함.
- 사지뱅이-골[골] 남대문 남쪽 입구에 있는 골짜기.
- 상수-리[산] 거쿠리 서남쪽에 있는 산. 상수리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음.
- 서낭-고개[고개] 거쿠리에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고개. 성황당이 있었다고 함.
- 성지-골[골] 남대문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소태-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잇는 골짜기. 가마골 위에 있음.
- 쇠목-골[골] 만마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 함.
- 쇠목골-고개[고개] 만마루에서 청원군 문의면 묘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쇠목골 위에 있음.
- 안-터[골] 남대문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안-어성골[골] 거쿠리 서북쪽 어성리쪽으로 있는 골짜기.
- 염티-골[골] 만마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염티-재(鹽峙)[고개] 만마루에서 청원군 문의면 염티로 넘어가는 고개. 염티골 위에 있음.
- 용-굴(龍窟)[굴] 거쿠리 뒷산에 있는 15m 정도의 굴. 옛날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 갔다고 함. 한발이 심할 때 회인현감이 이 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현감이 회인읍에 돌아가기전에 비가 내렸다고 함. 회인현의 4개의 우단(우단)중 한 곳임.
- 우래-실[골] 만마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에 항상 안개가 서려 있음.
- 우래실-고개[고개] 만마루에서 회북면 용곡리 우래실로 넘어가는 고개.
- 은정-골[골]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은이 나왔다고 함. 가마골 아래에 있음.
- 이괄-바우(李适岩)[바위] 남대문의 논에 있는 바위. 가로 7m, 세로 3m 정도가 됨.
- 인-천(人泉)[샘] 거쿠리 뒷산 용굴 속에 있는 옹달샘.
- 질마-재[산] 은정골 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소의 질마처럼 생겼다 함.
- 치알-봉[산] 남대문 북쪽에 있는 산. 높이 359m. 산형이 차일을 친 것처럼 생겼다 함.
- 형제-봉(兄弟峯:319m, 300m)[산] 마남루 북쪽에 있는 산. 산 봉우리 두 개가 나란히 있음.
5. 문화유적
- 호점산성(虎岾山城)
남대문리 북쪽. 거교리와 회북면 용곡리 경계에 있는 토․석축 산성으로 전체의 둘레는 2.722m. 해발 280m 이상의 산봉우리 5개 및 그 사이의 계곡을 둘러 쌓았는데 지형이 매우 험준한 서남쪽 1.2㎞는 토축하였다. 성벽 안쪽의 높이는 석축은 1.8m 토축은 2.3m 정도이고 문자리는 6개소가 확인되었다. 옛 문현기록에 의하면 고을의 남쪽 9리에 있고 둘레는 858보이며 매우 험하고 오래되어 무너졌으며 안에 샘이 있어 겨울,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在縣南九里周回八百五十八步險?久遠??內有泉一冬夏不竭)고 되어 있다. 전설에는 최영장군의 태를 붙었다고도 하고 금칼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사라들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양곡이 묻혀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 김호의 묘와 고현재(金濩墓와 羔峴齋)
만마루 뒷산에 있는 평택현감(平澤縣監) 증승정원도승지(贈承政院都承旨) 경주인(慶州人) 김호(金滸)의 묘소로 포수에게 쫒기는 꿩을 숨겨준 덕으로 꿩이 잡아준 명당이라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묘소 아래에 정면 4칸, 측면 2칸 후퇴의 목조와가 팔각지붕의 재실인 고현재(羔峴齋)가 있다.
- 양달해 효자각(梁達海 孝子閣)
거쿠리 입구에 있으며 현판은 효자증조봉대두동몽교관양달해지여(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梁
達海之閭) 효부증영인안동김씨지여(孝婦贈令人安東金氏之閭)로 되어 있다. 1905년(광무9)에 명정되어 남편의 아내의 효행을 기리는 정문으로 처음 신곡리에 세웠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6. 집성
- 남원양씨(南原梁氏)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양경(梁鯨)의 후손 15호가 거주하고 있음.
7. 산업
고추, 두류, 과수.
8. 전설
- 이괄바위
이괄이란 사람은 1587년(宣祖 20년)에 태어나 1624년(仁祖 2년)에 죽은 반란자이다.
그는 자를 백규, 본관이 고성으로 참판(오늘날의 차관) 육의 후손으로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여 선조 임금 때 형조좌랑(오늘날 법무부 계장급)과 태안군수를 지내고 1622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오늘날의 군사령관급)로 임명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이듬해 거사일에 작전지휘를 맡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해 후금과의 마찰로 국경에서 싸움이 잦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발탁되어 영변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성을 쌓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국경수비에 힘썼다.
1624년(仁祖 2년)에 그의 아들 전(旃)이 당시 지식층과 친구가 되어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횡포로 정치가 문란케 되었다고 개칸한 일이 있었던 바 이것이 과장되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무고로 발전되어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정부에서 수사관을 파견하자 반정시 공로가 으뜸임에도 불구하고 공신등급을 책졍할 때 저사공신 2등으로 취급한 일과 자신에게 의심을 갖고 있는 정부의 공신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되어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만이 지휘하는 정부군과 사워 참패를 당하자 이천으로 도망갔다가 부하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현재 회남면 남대문리에 있는 이괄바위는 원래 산에 있던 바위라 하는데 이괄이 이곳을 떠나면서 이 바위를 가리키면서
“만약 이 바위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가 이천에서 부하인 기자헌에게 죽은 날 밤 뇌성벽력이 일면서 그 커다란 바위가 절벽에서 무너져 내려 논에 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이 이 일로 하여 이 바위를 이괄바위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 용굴과 인천
먼 옛날 이 거쿠리 마을에는 서울에서 당파싸움에 쫓겨온 어느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일월”이라 부르는 미인의 여인 하나만 데리고 이곳에 와서 숨어 살았고 그 여인은 벼슬아치의 사랑하는 기생 첩이었다고 한다. 원래 어려서부터 글만 배운 탓으로 그 대감은 농사일이란 하나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일월은 주막을 차려 손수 술을 빚어 팔아 연명래 갔다. 그리고 일월은 팔을 걷어부치고 때로는 산에 가서 나무도 해왔고 이웃집 농사일도 거들어 주면서 남편을 편안하게 모시고 살아갔다. 그러나 신분을 감추고 사랑가는 두 사람들인지라, 나이 많은 영감이 젊은 아내를 의지하여 살아가는데 대하여 마을 남녀 노소들은 빈정거렸고 젊은 남성네들이 일월이 나무를 해올라치면 틀어박혀 책만 보면서 가냘픈 젊은 아내를 부려먹는 대감에 대하여 대놓고 욕지거리를 하기도 하였다. 대감은 차차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꼈고 일월에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일월의 곱던 얼굴은 이제 새까맣게 변해 버렸고 손은 마치 거북등같이 터졌고 손가락 마디마디 못이 박혔으나 여인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도끼삼아 남편을 봉양하였다. 대감은 더 일월의 고생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일월은 고생을 면할 길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어느날 일월이 나무를 하러 간 사이 새끼줄을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 용굴 옆에 서 있는 소나무 가지에 줄을 걸고 목을 매달았다. 일월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다시 남편이 속해 있던 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동지들이 보낸 사람들이 집에 도착하여 남편을 찾고 있었다. 일월과 서울서 온 사람들, 그리고 비로소 그들의 신분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대감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대감을 발견하였다.
일월은 구슬피 통곡하면서 이미 싸늘히 궂어진 남편이 혹시 살아날까 하여 사지를 주무르고 용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떠다가 대감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지를 주무르자 얼마 후에 대감의 얼굴에는 칫기가 돌며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감은 다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이튿날 서울로 떠나가는 대감과 일월은 죽었던 목숨을 건지게 해준 용굴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하여 생명을 구해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생명을 구해준 어진 물이라 하여 “인천(人泉)”이라 이름짓고 떠났다.
그 뒤로부터 이 물줄기를 “인천”이라 부르게 되었고 일월을 열녀라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많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대감을 살려준 이 물줄기에 모여들었는데 물빛이 마치 우유색깔 같았으며 물맛이 차고 매웠다. 특히 이 물은 위장병환자에게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하루에도 물의 양이 일정치 않고 많게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적어지고 적게 나오다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매산리(梅山里)
1. 위치
면적 1.30㎢, 인구 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어성리(漁城里), 서는 산수리(山水里), 남은 사음리(舍音里), 북은 남대문리(南大門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강외면(江外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매화(梅花)처럼 생겼다하여 매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매산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완전 수몰되고 높은 지대만 남아있다.
3. 자연마을
- 매-산(梅山)[마을] 마을 지형이 매화꽃처럼 생겼다고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완전 수몰되었음.
- 장성-말[마을] 매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장씨가 많이 살았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완전 수몰 되었음.
4. 기타지명
- 가는-골[골] 매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사음리 마름골 북쪽에 있음.
- 가막-골[골] 장성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사음리 마름골 동북쪽에 있음.
법수리(法水里)
1. 위치
면적 2.87㎢, 인구 37가구 95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7.5㎞ 지점인 면의 남서쪽에 위치하여 동은 사음리(舍音里), 서는 청원군(淸原郡) 문의면(文義面), 남은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북은 산수리(山水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강외면(江外面)의 지역으로서 뒷산에 법수사(法水寺)라는 절이 있어 법수골, 또는 법수(法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남(忠南) 회덕군(懷德郡) 주안면(周岸面)의 하창리(下倉里) 일부를 병합하여 법수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날-망[마을] 우무동 북쪽에 있는 마을. 법수리, 산쉴, 매산리, 사음리 등 4개리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넓고 평평하다. 대청댐 수몰로 인하여 이 곳에 여관, 음식점, 횟집, 교회, 시내 버스종점 등이 세워졌다. ‘어부동날망’이라고도 부른다.
- 셋돌-바우[마을] 날망 서북쪽에 있는 마을. 법수에서 산수리 분모골로 가는 길목임.
- 우무동(牛舞洞)[마을] 날망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소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에 큰 군창이 있어 하창리(下倉里)라고도 하였으며 20호가 되면 살던 사람이 이사를 하므로 항상 20호를 넘지않았다고 한다.
- 원법수(原法水)[마을] 우무동 서쪽에 있던 으뜸되는 마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다.
4. 기타지명
- 가여울-나루[나루] 원법수에서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 가여울로 건너던 나루.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국사봉(國師峰)[산] 우무동 동쪽에 있는 산. 절이 있었던 산이라 하여 ‘절재산’이라고도 함. 대전광역시와의 경계가 됨.
- 덕-고개(덕)[고개] 셋돌바우에서 산수골로 넘어가는 고개.
- 돌-마루[골] 새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일부 수몰되었음.
- 돌장-재[고개] 실미들에서 쌍가당여울소로 넘어가는 고개.
- 무-뱅이[골] 우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가난하여 무죽을 끓여 먹었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됨.
- 방이쌀개-바우[바위] 원법수 앞 쌍가당 여울 옆에 있었던 바위. 방아쌀개 같이 생겼다고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북수-골[골] 돌마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에서 신기한 물이 나와 목욕을 하였다고 함.
- 상주-재[고개] 원법수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
- 새-말[골] 원법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마을이 있었다 함.
- 성-골[골] 안쟁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성황당-고개[고개] 우무동에서 대전광역시 동구 오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성황당이 있었으나 지방도 571호선 개통으로 없어졌음. 대전광역시와의 경계가 됨.
- 소반양지산[산] 우무동 북쪽에 있는 산. 높이 215m.
- 실미-들[들] 돌마루 서북쪽에 있는 들. 농사를 지어 밥을 하면 밥맛이 좋고, 조금 식어도 맛이 변치 않았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다.
- 쌍가당여울-소[소] 원법수 북쪽에 있었던 소. 물이 양갈래로 흘렀음.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안-쟁(안정리)[골] 원법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안장같이 생겼다 함.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약물-탕[샘] 셋돌바우 밑에 있는 약수. 추석에 마을 사람들이 차사를 지난 음식을 갖다가 샘에 넣고 그 물로 목욕을 한다고 함.
- 여수-바우[바위] 원법수 동쪽에 있는 바위.
- 원앙-골[골] 돌마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작은-승적골[골] 우무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재짓-골[골] 우무동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중고개-골[골] 날망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중봉-산[산] 우무동 서쪽에 있는 산. 높이 167m, 노적가리와 흡사하다하여 ‘노적봉’이라고도 부름.
- 질마-고개[고개] 돌마루에서 원법수로 넘어가는 고개. 지형이 길마처럼 생겼다고함.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큰-승적골[골] 우무동 동쪽 국사봉에 있는 골짜기
- 함-봉[산] 원법수 동남쪽에 있는 산. 산세가 입을 다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함.
- 형-고개[고개] 우무동에서 날망으로 넘어가는 고개
- 형-골[골] 날망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 법수학교 옆에 있음.
5. 문화유적
- 법수리 선사유적(法水里先史遺蹟))
1976년 12월부터 1977년 1월에 걸쳐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대청댐 수몰지역 조사시 이 말을 작은 언덕에서 발견된 편마암 자갈돌로 된 쌍날찍개(116.6×124.0×59.2㎜ 날길이 14.0㎝ 무게 1,078.0g)와 석영 판자돌로 된 볼록날 긁개(121.8×121.3×38.3㎜ 날 7.0㎝ 무게 745.5g)와 규장암 판자돌로 된 것(176.1×142.8×29.2㎜ 날 10.2㎝ 무게 1,050.0g)과 반암 둥근돌로 된 기운날 긁개(85.3×63.0×24.7㎜ 날 12.5㎝ 무게 207.5g)등으로 현재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임.
- 경주김씨 절부비각(慶州金氏節婦碑閣)
1988년 충북유림에서 세운 비각으로 절효부경주김시기적비(節孝婦慶州金氏紀蹟碑)다.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은 홍살로 막았다. 비각의 둘레에는 돌담장을 둘렀다.
- 광산김씨제실(光山金氏祭室)
우무동에 있는 광산김씨 선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6. 집성
- 광산김씨(光山金氏)
우무동에 광산김씨 후예 13여호가 거주하고 있음.
7. 산업
잡곡, 어업, 써비스업.
8. 기타
지금의 중심마을인 우무동에 1992년 5월 4일 마을 자랑비를 세웠다.
분저리(分諸里)
1. 위치
면적 1.28㎢, 인구 29가구 65명(1999년말). 면 소재지에서 8.4㎞ 지점으로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판장리(板藏里)와 은운리(隱雲里), 서와 북은 용호리(龍湖里), 남은 서탄리(書灘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 지역으로서 고려때 최영(崔瑩)장군이 군량을 모아서 가루로 만들어 군사에게 주었던 곳이라하여 분저실 또는 분저곡(分諸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저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고 서탄리와 송포리(松浦里)의 남은 지역을 흡수하였다.
3. 자연마을
- 분저-실(分諸谷)[마을] 분저리의 중심되는 마을
- 아랫-말[마을] 분저실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염성-골(永志洞)[마을] 분저리 서쪽에 있는 마을. 본래 용호리에 딸린 마을이었으나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어 분저리에 속하게 되었음.
- 웃-말[마을] 분저실의 위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가산-도랑[내]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 가산사에서 은운리를 거쳐 분저실로 흘러 내리는 개울. 분저실에서 대청댐으로 들어감.
- 군막-골(軍幕谷)[골
- 군막-골(軍幕谷)[골] 분저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군막을 치고 주둔했었다고 함.
- 다람-베루[산] 분저실 남쪽에 있는 산. 산이 가파르로 바위가 있어 멀리서보면 돌로 된 사다리 같이 보인다. 서탄리로 건너가는 간이 선착장이 있음.
- 돼지털-골[골] 분저실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군막골 옆에 있음. 지형이 돼지새끼처럼 생겼다 함.
- 매봉-재[산] 분저실 서쪽에 있는 산. 높이 246m. 매처럼 생겼음.
- 매봉재-들[들] 분저실 서쪽 매봉재 아래에 있는 들.
- 모랭-이[모롱이] 분저실 서북쪽에 있는 모롱이. 분저실에서 거교리로 가는 길목에 있음.
- 모새-골[골] 분저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큰 배나무가 있음.
- 분저-나루(分諸津)[나루] 분저실에서 서당마루로 가는 도선장.
- 분저앞-들[들] 분저실 서쪽에 있는 들. 회남면에서 유일하게 경지정리가 되어 있음.
- 빈정-들[들] 분저실 서북쪽에 있는 들.
- 살목-재[고개] 분저실에서 용호리 살목으로 넘어가던 고개.
- 삼막-골[골] 분저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은운리와 경계가 됨.
- 서낭-댕이[당] 분저실 남쪽에 있는 성황당. 성황나무와 돌무더기가 있음.
- 안-골[산] 분저실 동쪽에 있는 산. 높이 162m. 마을 안에 있음.
- 안-고랑당[골] 윗말 동북쪽에 있는 산. 안골로 이어짐.
- 외처-불[들] 분저실 남쪽에 있는 들.
- 원앙-절[절] 분저실 동북쪽에 있었던 들. 빈대가 많아 폐사 되었다 함.
- 이만-평(二萬坪)[들] 분저실 남족에 있는 들. 전에는 산이었으나 개간하여 현재 밭으로 되어있으며 면적이 2만평 정도 된다고 함. 개간한 곳이라 하여 ‘팔밭’이라고도 부른다.
- 절터-골[골] 분저실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원앙절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함.
- 툇개-울[골] 분저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팔밭과 삼막골 중간이 됨.
5. 산업
쌀, 고추, 담배
사음리(舍音里)
1. 위치
면적 2.17㎢, 인구 43가구 114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5㎞ 지점으로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동은 신곡리(新谷里), 용호리(龍湖里), 사탄리(沙灘里), 서는 법수리(法水里), 남은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북은 매산리(梅山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강외면(江外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마름처럼 생겼으므로 마름골, 또는 사음곡(舍音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남(忠南) 회덕군(懷德郡) 주안면(周岸面)의 하창리(下倉里) 일부를 병합하여 사음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감탕-동(甘湯洞)[마을] 사음곡 동남쪽에 있었던 마을. 감초가 많이 났음.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마름-골(舍音谷)[마을] 사음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 새-동네[마을] 마름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새로 생겼음.
- 어부-동(漁夫洞)[마을] 마름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어부들이 많이 살았음.
- 재망-터[마을]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음.
4. 기타지명
- 가마-골[골] 마름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숯가마가 있었다 함.
- 개티-재(開峙)[고개] 어부동에서 대전광역시 동구 오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고개 마루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파티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티재’가 되었다고 함. 옛 조선시대에 회인현(懷仁縣)에서 회덕현(懷德縣)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 달돋이-고개[고개] 어부동에서 법수리 안쟁으로 넘어가는 고개. 달맞이 하던 곳이라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덕-고개(德峴)[고개] 어부동에서 매산리로 넘어가던 고개. 이 고개를 넘으면 덕을 받는다 함.
- 덕고개-골[골] 마름골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덕고개로 이어짐. 지방로 571호선 북쪽에 있음.
- 버리점-골[골] 어부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새동네 동쪽이 됨.
- 사자-골[골] 마름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사자-울[여울] 어부동 남쪽에 있는 여울.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살-여울[들] 사음리에 있었던 금강 유역의 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어부동-농원(漁夫洞農園)[농원] 새동네에 있는 사과, 복숭아, 포도 농원.
- 절-재[산] 어부동 남쪽에 있는 산. 절이 있었음.
5. 산업
고추, 담배, 땅콩, 써비스업.
사탄리(沙灘里)
1. 위치
면적 2.19㎢, 인구 면의 남쪽에 위치하여 동은 용호리(龍湖里)와 송포리(松浦里), 서는 사음리(舍音里), 남은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북은 용호리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 지역으로서 앞에 흐르는 금강(錦江)의 여울이 살같이 흐르므로 살여울 또는 사여울, 변하여 사자울 사탄(沙灘)이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면(西面)의 양중지리(陽中旨里) 일부를 병합하여 사탄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사자-울(沙灘)[마을] 사탄리 중심마을로 ‘살여울’‘사여울’이라고도 부르던 마을.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4. 기타지명
- 국사-봉(國師峰:319m) 사자울 동남쪽에 있는 산. 법수리와 대전광역시 경계가 됨.
- 말-무덤[묘] 사탄리에 있었던 큰 말무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다.
- 말채-나무[나무] 사탄리 말무덤 옆에 있었던 나무. 고려 최영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오던 나무로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다.
- 웃여울-께[여울] 사자울 남쪽에 있었던 금강의 여울.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5. 문화유산
- 사탄리 선사유적(沙灘里先史遺蹟)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여 있는 선사유적, 규장암 자갈돌로 된 자르게 긁개(98.6×48.5 ×24.0㎜ 날 7.3×4.2×5.4㎝ 무게 120.5g) 볼록날긁개(137.2×44.2×17.6㎜ 날 15㎝ 무게129g)와 석영자갈돌로 된 볼록날긁개(50.8×45.1×23.0㎜ 날 3.7㎝ 무게 51g)3 점과 뻘돌자갈돌로 만든 물고기 형체의 조각품(181.5×109.6×30.0㎜ 무게 932.0g)과 탄질천매암으로 만든 말 형체의 조각품(177.1×134.7×94.5㎜ 무게 224.0g) 등올 1976년 12월부터 1977년 1월까지 대청댐 수몰지구 조사시 발굴되었다
6. 전설
- 말채나무와 말무덤
회남면에는 지금은 대청댐으로 수몰된 사탄리라는 마을에 말채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최영장군이 말과 화살의 빠르기를 시합하기 위하여 활을 당기면서 말채찍을 갈겨 목표지점에 달려 갔는데 화살이 이미 지나 갔는지라, 말의 목을 치고 돌아서려 하자 비로소 화살이 날아옴으로 크게 탄식하고 채찍을 땅에 묻었는데 그대로 잎이 나고 큰 것이라고 전하여 왔다.
산수리(山水里)
1. 위치
면적 1.52㎢, 인구 14가구 35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6㎞ 지점으로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매산리(梅山里), 서와 북은 청원군(淸原郡) 문의면(文義面), 남은 법수리(法水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강외면(江外面)의 지역으로서 뒤에 산이 있고 앞에 강이 있어 산수가 매우 아름다워 산수골 또는 산수(山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행정리(杏亭里)를 병합하여 산수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덕고개-날망[마을] 어부동 날망 북쪽에 있는 마을. 대청댐 담수후 행정구역 개편시 산수리를 법수리에 폐합하였다가 법정리인 산수리를 부활시킬 때 편입된 마을임.
- 분두-골[마을] 산수골 서북쪽에 있었던 마을. 지형이 말(말)처럼 생겼다 함.
- 분무-골(治洞 杏亭里, 香亭里, )[마을] 분두골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지형이 풀무처럼생겼다고 하며 큰 정자가 있었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산수-골(山水洞)[마을] 산수리의 으뜸되는 마을.
- 장성-말[마을] 산수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장이 섰었다 하여 ‘장선말’이라 부르던 것이 변한 것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4. 기타지명
- 노-산(魯山)[골] 산수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골 다음에 있음. 노씨(魯氏)들의 산이 있었음.
- 말뚝-여울[여울] 산수골 북쪽 금강에 있었던 여울. 다른 곳은 깊이가 4~5m나 되지만 이곳은 무릎정도밖에 안 되어서 다리를 걷고 건너 다녔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배암-골[골] 산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백호-부리[등] 산수골 동쪽에 있는 산 등성이.
- 산수앞-골[들] 산수골 동쪽에 있는 들. 산수골과 백호부리 사이가 됨.
- 서당-샴[샘] 산수골에 있는 샘.
- 서당-지(書堂地)[산] 덕고개 밑에 있는 산. 예전에 아래에 서당이 있었다고 함.
- 소진이-골[골] 산수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요강-바우[바위] 분무골 북쪽 강가에 있던 바위. 요강처럼 생겼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절골[골] 산수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청룡 너머에 있음. 전에 절이 있었으나 빈대가 많아 폐사되었다고 함.
- 절-골[골] 분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절이 있었다 함.
- 철징-이[골] 분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청룡-부리[등] 산수골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
- 터-골[골] 분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팽나무-고개[고개] 산수골에서 매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마루에 팽나무가 서 있었음.
5. 집성
- 남원양씨(南原梁氏)
회남면의 최다성씨로 이곳에 제일 먼저 입향하였다고 하며 사람들이 쇠실, 판장 양씨와 구분하여 ‘강외양씨’라 불렀음. 현재 10여 가구가 거주함.
6. 산업
땅콩, 고추, 담배, 서비스업.
7. 기타
1993년 8월 31일 산수골에 마을 자랑비를 세웠음.
서탄리(書灘里)
1. 위치
면적 3.77㎢, 인구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옥천군(沃川郡), 서는 송포리(松浦里), 북은 분저리(分諸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탄리(儉灘里), 서당평리(書堂坪里)와 옥천군(沃川郡) 북일소면(北一所面) 대촌리(大村里)와 충남(忠南)회덕군(懷德郡) 주안면(周岸面) 오동령리(梧洞領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서당평과 검탄의 이름을 따서 서탄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다.
3. 자연마을
- 게0멀(儉灘 게머울)[마을] 서당평 서쪽에 있었던 마을. 앞에는 여울이 있었고 뒤에는 험준한 도산(島山) 절벽으로 가로 막혀 있음.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서당-평(書堂坪)[마을] 서탄리에서 으뜸되었던 마을. 조중봉 선생이 이 곳에서 쉬어 갔다고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4. 기타지명
- 게멀-여울[여울] 게멀 동북쪽에 있는 여울. 숯을 많이 구워 강물이 검은 빛을 발하였음.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게메울-재[고개] 분저실에서 사탄리로 넘어가는 고개.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날기터-골[골] 서당평 남쪽에 있는 골짜기. 날짐승의 깃같이 생겼다함.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음.
- 배내미-고개(舟越峙)[고개] 서당평 동남쪽에 있는 고개. 고개 형태가 임산부를 닮았다고 함.
- 배내미-늪[늪] 배나미고개 동쪽에 있는 늪.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서탄-나루[나루] 서탄리에서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로 건너던 나루터. 1980년 대청댐
- 서탄-선착장[선착장] 분저리 다람배루 선착장으로 건너 다닐 수 있는 선착장.
- 섬-메(島山:331m)[산] 서당편 서남쪽에 있는 산. 산형이 섬같이 생겼다고 하나 서탄리가 동․서․북 삼면이 강으로 둘려 있어 마치 섬처럼 보임으로 붙여진 이름임. 다음과 같은 월정(月亭) 김현복(金顯復)의 시가 있다.
목면산이 남쪽으로와 도산이 있고/ 도산이외 다시 산이 없다.
도산이외 영산이 없으니/ 제일 볼만한 산이 도산일세
(木谷南來有島山. 島山以外便無山. 島山以外寧無山. 第一壯觀有島山)
- 쇠레난-골(金破谷)[골] 전에 금을 캤다고함. ‘쇠파낸골’이 변한 것임.
송포리(松浦里)
1. 위치
면적 1.03㎢, 인구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서탄리(書灘里), 서는 사탄리(沙灘里), 남은 옥천군(沃川郡)과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북은 용호리(龍湖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마을앞 강가에 소나무 숲이 길게 있으므로 솔개 또는 송포(松浦)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포리라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솔-개(松浦)[마을] 송포리의 중심마을. 맑은 금강을 끼고 소나무 솦이 길게 욱어진 아름다운 마을이었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4. 기타지명
- 꽃밭-날[산] 송포 서쪽에 있는 산. 꽃이 많아 붙어진 이름이다.
- 논-골[골] 송포 서쪽에 있는 골짜기. 논이 많았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논골-고개[고개]
- 마당-바우[바위] 모구소 북쪽에 있는 바위. 마당처럼 편편하였다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모구-소[소] 대전광역시 동구 주천동 모고개 마을 앞에 있던 소.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뱃-들[들] 송포 동쪽에 있었던 들.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웃-골[골] 장자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웃-여울[여울] 송포 동북쪽에 있었던 여울.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장자-골[골] 송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말아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큰-골[골] 송포 동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신곡리(新谷里)
1. 위치
면적 1.79㎢, 인구 32가구 89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6㎞ 지점인 면의 중앙에 위치하여 동은 용호리(龍湖里)와 판장리(板藏里), 서는 어성리(漁城里), 남은 용호리, 북은 남대문리(南大門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읍리(新邑里)와 후곡리(後谷里)와 양중지리(陽中旨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신읍과 후곡의 이름을 따서 신곡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뒤에 면 소재지 마을이 되었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신곡 1.3리 및 2리의 일부가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뒷-골(後谷)[마을] 영당 서북쪽에 있는 마을.
- 새-별(新邑里)[마을] 영당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완전 수몰되었음.
- 양-중지(陽中旨)[마을] 옛 신곡리에서 으뜸되었던 마을. 옛날 이 마을에서 승지 벼슬한 사람이 많이 났다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본 마을은 완전 수몰되고 일부 수몰민들이 매람부리산 동쪽으로 이전하였음.
- 영당(影堂)[마을] 회남면사무소가 있었던 마을. 송시열(宋時烈) 송환기(宋煥箕) 양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이 있었으므로 ‘영당’이라고 불렀음. 영당의 이름인 흥인사(興仁祠)를 떠서 ‘興仁里’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완전 수몰되었음.
- 장-터[마을] 영당에 딸린 마을 장이 섰었음.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포-전[마을] 양중지 남쪽에 있는 마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4. 기타지명
- 강판-말[골] 뒷골에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골짜기. 새앙이라는 식물의 뿌리로 즙을 내어 팔던 마을 뒤에 있는 고개.
- 까치-고개[고개] 뒷골에서 새별로 넘어가던 고개.
- 구승-골[골] 양종지 서쪽에 있는 골짜기. 장래에 정승 아홉이 나온다는 골짜기라 함.
- 논-꼬맹이[고개] 뒷골 동쪽으로 해서 거교 2리로 가는 고갯길. 고개가 작아 붙여진 이름.
- 뒷-골[골] 뒷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어성고개까지 이어짐.
- 매람부리-산(楓巖山:138m)[산] 양종지 서쪽에 있는 산. 회인천을 따라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금강에 이르렀다. 금강의 바람이 모두 이곳에 쳐 온다. 회남대교 동쪽에 있다.
- 매-봉[산] 뒷골 동남쪽에 있는 산. 매의 형체를 닮았다 함.
- 새모-봉[산] 산형이 세모가 났음.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안뫼-골[골] 뒷골 남쪽에 있었던 골짜기.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어부동-고개[고개] 양중지 서쪽에 있는 고개. 회남대교 입구에 있음.
- 어성-고개[고개] 뒷골에서 어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 영귀-대(詠歸臺)[바위] 영당 북쪽 회인천가에 있던 바위 절벽. 우암(尤庵) 송시열(宋詩烈)이 찾아 놀던 곳이라고 함. 뒤에 우암선생 유상지처라 하여 유상대(遊賞臺)라고도 불렀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장-고개[고개] 뒷골 동북쪽으로 해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고개
- 철정이-고개[고개] 새볕에서 양중지로 넘어가는 고개. 큰 무쇠솥을 가지고 넘어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
- 회남-대교(懷南大橋)[다리] 신곡리에서 사음리로 가는 다리. 1980년 12월 대청호반 위에 놓은 다리로 길이 450m, 너비 10m의 철근콘크리트로 된 다리로 교각의 높이가 57m(상판포함 60m)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다리임.
5. 문화유적
- 어필각(御筆閣)
1756년(영조32)에 왕이 지은 글을 직제학(直提學) 문명구(文命龜)에게 하사한 것을 현판하여 보존하였던 곳.
- 효열각(孝烈閣))
1905년(광무9) 효자 양달해(梁達海)와 효열부인 그의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정문으로 1980년 대청댐 담수로 남대문리로 이건하였음.
6. 산업
서비스업, 어업.
신추리(新秋里)
1. 위치
면적 1.69㎢, 인구 12가구 24명(1999년말). 면소재지로부터 4㎞ 지점으로 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동과 북은 회북면(懷北面), 서는 거교리(巨橋里), 남은 금곡리(金谷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 지역으로서 추자나무가 많아 가래울 또는 추동(楸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추동(上楸洞)을 병합하여 신추리(新秋里)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가래-울(楸洞)[마을] 신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옛날에 마을 앞 여울목에 큰 가래나무가 있었다함. 현재도 추자나무가 많음.
- 상-추동(上楸洞)[마을] 가래울 위쪽에 있는 마을.
- 아랫-말[마을] 가래울 아래쪽에 있었던 마을. 50여년전에 폐동이 되고 현재는 잠실만 있음.
- 하-추동(下楸洞)[마을] 가래울 아래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가래-안골[골] 상추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 가래울-골[골] 하추동 남쪽 상추동으로 가는 골짜기.
- 가래울-안골[골] 하추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가장-들[들] 가래울 서쪽으로 마을 입구에 있는 들.
- 너멍-골[골] 하추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너멍골 고개 너머에 있음.
- 너멍골-고개[고개] 가래울에서 너멍굴로 넘어가는 고개.
- 달밭-골(月田洞)[골] 가래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인가가 있었으나 철거되었음. 골짜기가 우묵해서 난리때 마을 사람들이 이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그날 밤 유난히 달이 환하게 비치었기 때문에 ‘달밭골’이라 불렀다고 함.
- 머그남-골[골] 가래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머귀나무골’이라 부르던 것이 ‘머그남골’로 변하였고 지금은 오동나무도 없어졌다 함. ‘머귀’는 ‘오동(梧洞)’의 옛말임.
- 버드낭-골[골] 가래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버드나무가 있었기에 ‘버드나무골’이라 하던 것이 줄어서 ‘버드낭골’이 되었음.
- 불당-골(佛堂谷)[골] 가래울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절이 있었다 함.
- 솔밭-음지[버덩] 가래울에서 북쪽으로 음지편에 있는 버덩. 소나무가 우겨졌었다고 함.
- 쇠-메기[고개] 가래울에서 회북면 송평리로 넘어가는 고개.
- 쇠실-고개[고개] 가래울에서 금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 십자-봉(十字峯:230m)[산] 가래울 북쪽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열십자(十字)형태라 함.
- 으렁-골[골] 가래울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중뫼 옆에 있음. 으름 나무가 많아 ‘으름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였음.
- 작은-골[골] 가래울 동쪽 홍두깨날 옆에 있는 골짜기.
- 장-날[등] 개래울 동쪽에 있는 등성이.
- 재피-골[골] 가래울 동쪽에 잇는 골짜기. 작은골 옆에 있음.
- 중-뫼(中山:232m)[산] 가래울 남쪽에 있는 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의 오른쪽에 있음. 옛 회인현의 중심이 되었다고 함.
- 진등-날[등] 가래울 동쪽에 있는 등성이. 국사봉에서 내려오는 등성이로 매우 길다고 함.
- 큰-골[골] 가래울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가래울에서 가장 큰 골짜기임.
- 홍두깨-날[등] 가래울 동남쪽에 국사봉에서 뻗어나온 등성이.
5. 문화유적
- 지석묘(支石墓)
상추동 마을 뒤쪽 밭에 있다. 경사진 가장자리에 있어 개석(蓋石)이 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고 북쪽 일부는 흙으로 덮혀있다. 크기는 길이 284㎝, 너비 200㎝, 두께 53㎝ 정도로 장축방향은 북동~남서 방향이며 둘레에는 치석을 하였던 흔적이 보인다. 개석 밑에는 장축방향과 엇갈리게 남, 북쪽에 놓인 지석(支石)이 있다.
- 추향사지(秋陽祠址)
어당(峿當) 이상수(李象秀)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1912년 제자인 박문호(朴文鎬)가 옛 집터에 세웠던 영당이다. 뒤에 회인 유림들에 의하여 문인(門人)인 박문호(朴文鎬), 양주승(梁柱承), 양주학(梁柱學), 박용호(朴龍鎬), 박순행(朴洵行), 양주하(梁柱河)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하고 춘․추로 제향을 하던 사우(祠宇)로 1995년 금곡리로 이전되었다.
6. 산업
고추, 담배, 마늘, 잡곡
어성리(漁城里)
1. 위치
면적 1.27㎢, 인구
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동과 남은 신곡리(新谷里), 서는 매산리(梅山里), 북은 남대문리(南大門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성처럼 되었으므로 어성이 또는 어성(漁城)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성리(漁城里)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완전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어성(漁城)[마을] 어성리의 중심마을.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완전 수몰되었음.
4. 기타지명
- 갓모-봉[산] 어성이 북쪽에 있는 산. 산형이 갓모처럼 생겼다 함.
- 대궐-터[골] 승지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대궐처럼 큰 집이 있었다 함.
- 마굴찬[골] 어성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못된 무리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고 함.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멀티-고개[고개] 어성이에서 신곡리 뒷골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험하고 멀다 함.
- 성-재[산] 대궐터 남쪽에 있는 산. 성터가 있음.
- 성주-바우[바위] 어성이 서북쪽에 있는 바위.
- 승지-골[골] 어성이 동북쪽에 있는 골자기. 경치가 좋고 아름답다 함.
- 어근-봉[산] 어성이 서북쪽에 있는 산. 산형이 탕건처럼 생겼음.
- 어성이-골[골] 어성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남대문리 경계까지 이어짐.
- 어생이-여울[여울] 어성이 서쪽에 있었던 여울.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탐생이-나루[나루] 어성이에서 사음리로 건너가던 나루터. 새우가 많이 잡혔으나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터-골[골] 갓모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터가 있었음.
용호리(龍湖里)
1. 위치
면적 2.36㎢, 인구
면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동은 판장리(板藏里), 남은 송포리(松浦里)와 사탄리(沙灘里), 북은 신곡리와 판장리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용소(龍沼)가 있었으므로 용호(龍湖)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탕산리(宕山里), 영승리(永承里), 풍계리(風溪里)와 서면(西面)의 양중지리(陽中旨里) 일부를 병합하여 용호리라 해서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거의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덕-거리[마을] 염성골 서쪽에 있었던 마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바탕-뫼(宕山.탐상)[마을] 큰말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마을 뒷산이 감투처럼 생겼다 함.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살-목(陰中旨)[마을] 용호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앞에 산림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음.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염성-골(永志洞)[마을] 큰말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전에 염씨가 많이 살았다고 함.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음.
- 용-호(龍湖)[마을] 염성골 서남쪽에 있었던 으뜸되는 마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조산-너머[마을] 바탕뫼 동쪽에 있었던 마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큰-말(楓溪村)[마을] 염성골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전에 크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함. 앞에 풍계천이 흐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항각-골[마을] 조산너머 동쪽에 있었던 마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4. 기타지명
- 게메울-고개[고개] 장구매기에서 서탄리 게메울로 넘어가던 고개.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구승-골[골] 살목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장래에 아홉 정승이 나온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함.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음.
- 구승골-소류지[못] 구승골에 있는 저수지.
- 살목-고개[고개] 살목에서 분저리로 넘어가던 고개. 대청댐 담수로 수몰됨.
- 염성골-포강[못] 염성골 서쪽에 있었던 못.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장구-매기[골] 살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장구 같이 생겼다 함.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음.
- 항각-골[골] 바탕뫼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음.
은운리(隱雲里)
1. 위치
면적 3.30㎢, 인구 9가구 17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20㎞ 지점으로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옥천군(沃川郡), 서는 분저리(分諸里), 북은 판장리(板藏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동면(東面)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언목리(彦目里), 지경리(地境里), 광성리(光城里)와 옥천군(沃川郡) 안내면(安內面) 용촌리(龍村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은운리(隱雲里)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을-미기(彦目.은목)[마을] 은운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여 있음.
- 지경-말(地境里)[마을] 을미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와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마을이 갈라져 있음.
- 지장-골(地長谷)[마을] 지경말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1980년 보은 수해로 폐동되었음.
- 진주-골(長主谷)[마을] 지경말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긴골짜기 밑이 됨. 중봉(中峰) 조헌(趙憲)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함.
4. 기타지명
- 가-산[골] 지경말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임.
- 가산-사(佳山寺)[절]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 절골 중턱에 있는 절.
- 늘윗-골[골] 지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단지-골[골] 지경말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장군봉에서부터 발원된 샘물이 단지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
- 도가마-골[골] 지경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최일 장군 누나가 반지를 잃어 버리고 찾으려고 판 곳이라 함.
- 도덕-골[골] 을미기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도마-티[고개] 지장골에서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 용수말로 넘어가는 고개. 조헌 선생이 도래밭터에서 가산사에 이르는 곳에서 배필을 만난 고개라고 함.
- 도마티-골[골] 지장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 뒤가 됨.
- 문티-고개[고개] 지장골에서 판장리 늘티로 넘어가는 고개. 질그릇을 만들던 곳이라 함.
- 바개-목[산] 지경말 북쪽에 있는 산. 조헌 선생이 낮잠을 즐기던 곳이라 함. '벼개목‘이 변한 것임.
- 배나무-골[골] 지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사래-골[골] 지경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장골까지 이어짐. 옥천군과의 경계가 됨.
- 서낭-고개[고개] 을미기에서 분저리로 넘어가는 고개. 성황당이 있었음.
- 소매-골[골] 지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늘윗골과 배나무골 중간에 있음.
- 솔뿌리-날[등] 을미기 서쪽에 있는 산줄기.
- 송-골[골] 을미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큰소나무가 있어서 붙혀진 이름임.
- 안진-독[바위] 판개들 동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독을 앉혀 놓은 것 같음.
- 오봉-산(五峯山)[산] 지장골 동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다섯임.
- 장-고개[고개] 지경말에서 옥천군 안내면 막지리로 넘어가는 고개.
- 판개-들(성재바우)[바위] 을미기 서쪽에 있는 바위. 꼭 같은 바위가 둘 있음. 아래 부분은 수몰되고 만수위 때 5m정도만 남는다고 함.
- 판개-봉[산] 을미니 서북쪽에 있는 산. 최일 장군이 판개돌을 이 산 너머로 던지려고 했었다고 함.
조곡리(鳥谷里)
1. 위치
면적 2.86㎢, 인구 40가구 106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 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수한면(水汗面) 노성리(老城里), 서는 거교리(巨橋里), 남은 판장리(板藏里), 북은 금곡리(金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국사봉(國師峰)과 호점산성(虎岾山城)사이가 되므로 새실 또는 조곡(鳥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곡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고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45년에 면사무소가 신곡리로 이전되고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마전-사(麻田寺)[마을] 새실 동쪽에 있는 마을. 조곡 2리임.
- 새-실(鳥谷)[마을] 조곡리의 중심 마을 조곡 1리임. 마을 형상은 돼지가 누워 9마리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이라 하며 전면에서 보면 새조(鳥)자 모양을 하고 있다 함. 조선시대 이곳에서 생산된 담배(南靈草)가 유명하였다고 함.
4. 기타지명
- 가는-골[골] 마전사 남쪽 구수샴골 밑에 있는 골짜기. 골이 가늘고 깊음.
- 건너-들[들] 새실 남쪽에 있는 들. 마을 건너편에 있다하여 ‘건너들’이라 함.
- 굽은-딩이[모롱이] 마전사 입구에 있는 모롱이.
- 구수샴-골[골] 마전사 남쪽에 있는 골짜기, 구유처럼 생겼다 함.
- 남산-골(南山谷)[골] 마전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느름싱이[산] 새실 동남쪽 여수구미 건너편 음달쪽에 있는 산.
- 달기-봉[산] 마전사 서쪽에 있는 산.
- 도람-말[모롱이] 새실에서 판장리로 돌아가는 길 모롱이.
- 독박-골[골] 마전사 서쪽, 방아다리 뒤에 있는 골짜기. 밭에 잔돌이 많음.
- 동대-골[골] 구수샴골 옆에 있는 골짜기.
- 때-골[골] 새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매-봉[산] 마전사 동쪽에 있는 산. 매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함.
- 방아-다리[골] 새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생겼다 함.
- 벼락-바우[바위] 마전사 앞 길가에 있는 바위. 두 쪽으로 갈라졌음.
- 산-건너[산] 새실 남쪽에 있는 산.
- 새-청[산] 세실 서쪽 마을 입구에 있는 산. 예부터 관청의 새청사가 들어설 곳이라 하여 ‘새청’이라 불렀다고 함. 대청댐 담수로 회남파출소가 이전되어 왔다.
- 서-고개[고개] 마전사 입구에 있는 고개.
- 아리랑-고개[고개] 마전사에서 구수샴골로 넘어가는 고개. 빙애를 끼고 돌아가게 되어 있음.
- 아망-골[골] 새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여수-구미[산] 새실 동남쪽에 있는 방아다리 밑에 있음.
- 은행-나무[나무] 마전사에 있는 나무. 수령 약 600년 이상으로 추측됨.
- 이팥-재[고개] 마전사 동쪽에 있는 고개. 아리랑 고개 밑에 있음.
- 잿-마당[고개] 새실서 금곡리 스승골로 넘어가는 고개.
- 찬물샘-께[샘] 아망골 안쪽에 있는 샘.
- 허궁-다리[골] 마전사 북쪽 국사봉 밑에 있는 골짜기. 방공호처럼 움푹 패인곳이 있음.
5. 문화유적
- 마전사지(麻田寺址)
마전사 마을에 있다. 창건년대는 미상으로 옛 지리지의 기록에 다르면 노성산(老城山)에 있다라고만 되어 있다. 현재 사지에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 2그루가 있고 동편 은행나무 앞으로 석축의 흔적이 일부 있으나 절터와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세조가 속리산에 순행할 때 이 절에서 3일간 머물면서 베옥을 빨아 말리고 사슴도 그냥하였다 하여 마록사(麻鹿寺)라고도 불렀다 하고 또 은행나무는 국난이 생길 징조가 있으면 ‘증․증’하고 울어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몇 년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은 뒷산인 국사봉(國師峰:552m)에서 매년 정월 14일 산제를 올리고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려 마을의 보호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 국사봉 우단(國師峰雩壇)
마전사지 위쪽에 있었던 조선시대 회인현 기우제터다. 회인현 4우단 중 하나였다.
6. 집성
토착성씨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나 현재 10여 호만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7. 산업
미곡, 고추, 잡곡, 두류.
8. 전설
- 벼락바위
마전사의 주지승은 평소 열심히 도를 닦아 자신이 득도한 도술은 감히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하다고 자부했고 세상에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자신을 가질만큼 도술에 능통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절에 허름한 옷차림의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도승을 보니 눈빛이 찬란하고 온몸에 서기가 서려 있어 한 눈에 보아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지승은 이유없이 불쾌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주지승은 이 도승이 재주를 시험해 봄으로써 자신의 자괴지심을 풀어 보려고 마음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주지승은 도승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소승이 평소 요술을 익힌 바 있으니 한 번 구경을 하고 그대로 할 수 있으면 해 보시구료”했다. 이에 도사는
“소승은 본시 탁발만 하였을 뿐 배운 것이 없어 어찌 대사와 더불어 도술을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겸손하게 사양을 했는데도 주지승은 말은 듣지 않고 말을 끌어온 후 사뿐히 등에 올라타서는
“보시오. 내가 저 앞에 보이는 바위에 말을 타고 올라가서 재주를 부릴 터이니 객승도 한번 해보시구려”했다.
그런데 도승이 주지승이 가리키는 바위를 보니 그 바위는 용좌바위로 용궁에 있는 용왕이 일년에 한번씩 정월 대보름날 밖으로 나왔을 때 앉아 쉬는 자리였다.
“대사, 다른 재주는 다 하셔도 좋으나 저 바위 위에 올라가시는 일은 맙소서”하고 만류했다. 주지승은 매우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바위가 무슨 바위요?”하고 물어 보았다.
“무슨 바위인 줄은 스승이 알 수 없으나 보기에 매우 신성한 바위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르면 가만히 계시오. 쓸데없이 아는 체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요”하면서 주지승은 바위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도승은 만류할 수 없음을 알자 황급히 절안으로 도망치듯 숨었다.
“보기보다는 겁이 많은 중이구나” 주지승은 중얼거리며 단숨에 바위 위에 뛰어올라가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어지면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졌다. 하늘은 다시 쾌청해졌고 서쪽하늘엔 샛별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절에 숨어 있던 도승은 비로서 밖으로 나와 바위 있는 곳을 바라 보았다. 참으로 보기에도 처절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과 말이 바위와 함께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채로 두 동강이가 나 있었다. 도승은 두 손을 합창하며 주지승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중이 말타고 놀다가 벼락을 맞은 바위라 하여 “벼락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 은행-나무
옛날에 “마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암, 수의 두 은행나무가 있었다. 암나무는 절경내에 있었고 또 한그루(수컷)는 동구밖에 있었다고 한다. 이 두 나무는 서로 바라보며 때가되면 열매를 많이 맺어 큰 소득이 되었으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침 저녁으로 청소를 하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주지승은 절 경내에 서 있는 한 그루를 베어 버리면 청소하기에 용이하다고 생각하고 베도록 하였으나 행자승들이 일제히 반대를 하고 협조하지 아니하므로 손수 큰 톱을 갖다 대고 베기 시작했다. 행자승들이 반대를 한 것은 비록 낙엽질 무렵에는 온 사찰 경내가 지저분하지만 경내에 은행나무가 있어야지 경관에 어울린다고 베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주지승이 나무를 베기 시작한지 사흘만에 나무가 쓰러졌는데 그와 동시에 은행나무에서는 우유빛 백색물이 솟아나왔고 나무를 벤 주지승은 톱을 쥔 채로 현장에서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변고가 생기고부터 절은 퇴락하게 되었고 이곳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동구밖에 서 있던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도 한달 전부터 울었고 6.25동란 때는 약 1주일을 두고 마을이 울리도록 깊은 밤중에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나무는 나라에 변고를 미리 예고해 주는 신기한 나무로 여기고 있으며, 보은군 나무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9. 기타
1994년 12월 27일 새실 입구에 마을 자랑비를 건립하고 지방도 571호선변에 조곡리 마을 농산물 집판장을 개설 운영하고 있음.
판장리(板藏里)
1. 위치
면적 8.18㎢, 인구 16가구 27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4㎞ 지점으로 면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은 수한면(水汗面) 노성리(老城里), 서는 용호리(龍湖里)와 신곡리(新谷里), 남은 은운리(隱雲里)와 분저리(分諸里), 북은 조곡리(鳥谷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널처럼 되었으므로 늘개미, 광포(廣浦) 도는 판장(板藏)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담리(沙潭里) 일부를 병합하여 판장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광-포(廣浦)[마을] →도목
- 늘개-미[마을] 솽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 판장 1리임.
- 늘-티(板峙洞)[마을] 판장 동남쪽에 있는 마을.
- 도덕-골(道德)[마을] 늘티 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이 곳에서 도덕군자가 많이 났다 함.
- 도-목(道目․퇴목)[마을] 늘개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이 곳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 많았다 함. 판장 2리임.
- 비럭-골[마을] 도목 서쪽에 있던 마을. 가난한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붙혀진 이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큰-골(大谷)[마을] 도목 동북쪽에 있는 마을. 큰 골짜기가 있음.
- 흐리-실[마을] 도목 동남쪽에 있는 마을. 이 곳에 있는 암석위로 언제나 물이 흐르고 있음. 화전정리 후 폐동이 되었음.
4. 기타지명
- 가는-골[골] 도목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굴멍-골[골] 도목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꺼치렁-골[골] 도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남산-골[골] 모아골 북쪽에 있었던 골짜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늘개미앞-들[들] 늘개미 앞에 있는 들. 대청댐 담수로 대부분 수몰되었음.
- 느름샘이-골[골] 늘개미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늘티-골[골] 도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늘티고개까지 이어짐.
- 늘티-고개[고개] 늘티에서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로 넘어가는 고개.
- 도덕골-고개[고개] 도덕골에서 은운리로 넘어가는 고개.
- 돌성-골[골] 뱀진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외부 침입을 막고자 돌로 쌓았다하여 돌성골이라고 한다 함.
- 딸-바우[바위] 무당바우 남쪽에 있는 바위. 절벽같이 비스듬이 되었는데 돌을 던져 얹히면 딸을 낳는다 함. 지금은 없어져 볼 수 없음.
- 뙈-골[골] 광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떼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붙인 이름.
- 모야-골[골] 도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자생하던 모야(담배)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 무당-바우[바위] 부엉데미 동북쪽에 있는 바위. 무당이 신을 받기 위해 정성을 드리던 바위라고 함.
- 방아진-골[골] 활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물레방아가 있었던 골짜기임.
- 뱀진-골[골] 늘티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부엉-데미[골] 광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부엉이가 둥지를 짓고 살았다 함.
- 부처당-바우[바위] 딸바우 북쪽에 있는 바위.
- 불무정-골[골] 도목 서쪽에 있는 골짜기. 숯을 구웠던 골짜기.
- 비득-골[골] 늘개미 남족에 있는 골짜기.
- 선반-다리[고개] 도목에서 수한면 노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선반 다리같이 생겼다고 함.
- 숫가마-골[골] 도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숯을 구웠음.
- 아들-바우[바위] 무당바우 북쪽에 있는 바위. 바위가 비스듬이 있는데 돌을 던져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함.
- 안진-바우[바위] 광포 북쪽에 있는 바위. 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생겼다 함.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어두니[골] 도목 동쪽에 있는 골짜기. 물고기의 머리 모양같이 생겼다고 함.
- 어루-머니[골] 환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가 깊어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다고 함.
- 작은-골[골] 꺼치렁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선반다리 길목이 됨.
- 작은-퇴끼골[골] 도목 서쪽에 있는 골짜기. 큰퇴끼골 아래에 있음.
- 큰-골[골] 작은골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큰골 마을이 있음.
- 큰-퇴끼골[골] 작은 퇴끼골 위에 있는 골짜기. 산토끼 굴이 많다고 함.
- 활-골[산] 안진바우 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함.
- 회나무-골[골] 도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회나무가 있음.
5. 산업
담배, 축산, 어업, 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