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부면
- 고승리
- 구암리
- 대양리
- 덕동리
- 매화리
- 벽지리
- 사직리
- 상장리
- 성지리
- 임한리
- 장암리
- 평각리
- 하장리
탄부면(炭釜面)
1. 위치
면적 31.63㎢, 인구 1,028가구 2,853명(1999년말). 보은군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마로면(馬老面), 서는 삼승면(三升面), 남은 마로면(馬老面)과 삼승면(三升面), 북은 보은읍(報恩邑)과 외속리면(外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의 지역으로서 석탄(석탄)이 생산되므로 탄부면(炭釜面)이라 하고 하장(下長), 구암(龜岩), 상관(上官), 하소여(下所餘), 상소여(上所餘), 기대(箕大), 하관(下官), 중관(中官), 하벽지(下碧池), 상벽지(上碧池), 덕동(德洞), 장암(壯岩), 경상(景祥), 석화(石花), 지덕(至德), 상장(上長), 중소여(中所餘), 신당(新塘)등 1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대, 상소여, 중소여, 하소여 4개 리는 마로면에 넘겨주고 마로면의 대양(大陽), 성지(城池), 쌍암(雙岩)의 3개리와 사각면(思角面)의 구인(求仁), 신동(新洞), 평각(坪角), 고승(高升), 사직(士直), 매화(梅花), 나부(羅浮), 운현(云峴)등 8개 리와 왕래면(旺來面)의 임한(林閑)을 병합하여 장암(壯岩), 덕동, 벽지, 하장, 구암, 상장, 대양, 성지, 구인, 평각, 고승, 매화, 임한의 14개 리로 개편, 상장리를 면소재지로 하였다가 뒤에 하장리로 옮겨 관할하다가 1946년 2월 1일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구인리를 외속리면에 넘겨주고 현재 13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3. 자연
면의 북부는 비교적 낮은 산지로 되어 있으며, 중앙부에 국사봉(國仕峯:363m)이 고립 형태로 솟아 있으며, 남부면계에 비조티(飛鳥峙), 울미산(雲霧山:450m)등이 있어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중앙부에 있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원형의 저지가 둘러싸고 있으며, 보청천(報靑川)이 서북부에서 남류하다가 동류하는데 그 주위에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가 전개되고 있다.
4. 산업
논 1,067㏊, 밭 293㏊, 임양 1,253㏊로 주산업은 쌀이다. 특히 평각리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은 양질미로 널리 알려졌으며, 하장리와 고승리에서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원예작물재배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5. 교통・문화
청주~보은~상주간의 국도 25호선이 면의 동부를 지나고 있으며, 원남~관기의 지방도 502호선이 남부를 통과, 임한리에서 국도와 연결되고, 괴산~영동간의 국도 19호선과 연결된 군도 11호선이 서부를 관통하면서 덕동리에서 지방도 502호선 연결되며 군도 11호선이 매화리에서 면의 북부를 동서로 연결시키는 등 사통팔달되여 있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하장리에 이창경(李昌慶), 원경(元慶), 명경(鳴慶) 삼형제와 연안김씨, 창녕성씨 등의 효열을 기리는 월성명정(月城銘旌)과 이제현(李劑賢)의 영당(影堂)인 염수재(念修齋)가 있는데 익재영정(益齋影禎)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덕동리에는 이형손(李亨孫)의 부조묘인 충훈사(忠勳祠)가 있으며 평각리에 김한붕(金漢鵬), 도명(道明)부자의 효자정문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와 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고승리(高升里)
1. 위치
면적 2.25㎢, 인구 93가구 264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7㎞ 지점으로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시작리(士直里), 서와 북은 보은읍(報恩邑), 남은 삼승면(三升面)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사각면(思角面)지역으로 고승이 또는 고싱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승리(高升里)라 해서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고싱이(高升 - 고싱기)[마을] 고승리의 중심마을이다.
- 대외[마을] 고싱기 마을의 중간부분에 있는 마을.
- 쇠저-골[마을] 아랫말 동쪽에 있는 마을.
- 아랫-말[마을] 고싱기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아래-모태[마을] 고싱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 아래 모퉁이에 있음.
- 웃-말[마을] 고싱기의 위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가십-보(可習洑)[보] 고싱기 서남쪽 보청천에 있는 보.
- 가잿-말[들] 고싱기 남쪽에 있는 들. 전에 가재가 많이 있었다 함.
- 고승-보(高升洑)[보] 고싱기 서북쪽 보청천에 있는 보.
- 골-안[골] 웃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 골안-샘[샘] 골안에 있는 샘.
- 됭-개[산] 고싱기 북쪽에 있는 산. 산넘어는 보은읍 월송리가 됨. 된서리가 가장 일찍 내리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산의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도 함.
- 됭개-고개[고개] 고싱기에서 보은읍 월송리로 가는 고개
- 둥구-나무[나무] 고싱기 가운데 있는 둘레가 6아름정도 되는 난무로 고싱기 마을이 전에 개울자리였는데 이 때 떠내려오던 느티나무가 둑에 걸려 자란 것이라고 함.
- 또랑-너머[들] 고싱기 서남쪽에 있는 들. 도랑 건너편에 있음.
- 매봉-재[산] 고싱기 동쪽에 있는 산. 산에 봉우리가 많고 높기도 하여 “뫼봉재”라 하던 것이 변한 것임.
- 무-터[들] 고싱기 남쪽에 있는 들. 가잿말 남쪽임. “물터”가 변하여 “무터”가 됨.
- 부처집-골[골] 아랫말 서쪽응로 됭게 밑에 있는 골짜기. 전에 고승보를 막을 때 개울바닥에서 부처가나와 이것을 모시고 불당을 지었으나 이 부처는 중간에 분실되었고 혀재의 것을 새로 사다가 놓은 것이라고 함.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치성 드리려고 많이 왔었으나 현재는 퇴락되었음.
- 분덕-골[골] 고싱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비가 오는 날에는 도깨비가 나오는 골이라 해서 “분도골”로 부르다가 “분덕골”로 변한 것임.
- 쇠저-골[골] 아랫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승조-골[골] 웃말 위됭개들 옆에 있는 골짜기. 보은읍과 경계임.
- 외-골[골] 아랫말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외골-고개[고개] 고싱기에서 사직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높고 외지다고 함.
- 웃-보들[들] 아랫말 남쪽에 있는 들. 가잿말부터 평전을 통틀어 웃보들이라 부른다.
- 윤-모랭이[길] 고싱기에서 사직리로 가는 길목.
- 월고지-골[골] 윗고싱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장터-골[골] 고싱기 동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장이 섰던 곳이라 함.
- 잭-배기[등] 아랫말과 웃말 사이에 있는 등성이.
- 평-전(평전)[들] 고싱기 서남쪽에 있는 들.
- 학-골[골] 외골에 속한 골짜기.
5. 집성
- 풍천임씨(豊川任氏)
금시당(금시당) 후손의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져 왔으나 현재는 웃고싱기에 10여호가 거주하고 있음.
- 경주김씨(慶州金氏)
상촌공(桑村公)후손과 판도판서(版圖判書)공 후손 30여호가 아랫고싱기에 거주하고 있음.
6. 산업
쌀, 원예
7. 기타
1993년 마을앞 도로변에 마을자랑비를 세움.
구암리(九岩里)
면적 1.72㎢, 인구 66가구 218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6㎞지점인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마로면(馬老面), 서는 하장리(下長里), 남은 대양리(大陽里), 북은 임한리(林閑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탄부면(炭釜面)의 지역으로서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거북바위, 귀바우, 또는 구암(龜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관리(中官里)와 하관리(下官里)를 병합하여 아홉 개의 바위가 있다하여 구암리(九岩里)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귀-바위(龜岩)[마을] 구암리의 으뜸되는 마을.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음.
- 안-말[마을] 귀바위 남쪽에 있는 마을. 구암리에 있는 마을중 안쪽에 있음. “안뜸”이라고도 함.
- 주막-거리[마을] 안말 동쪽에 있는 마을. 구암리가 관기, 보은, 원남, 청산으로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로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많아 주막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음.
- 중관-말(中官里, 中間里, 중뜸)[마을] 안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 구암리에서 중간에 해당됨.
- 하관-말(下官里, 아랫말)[마을] 안말 남쪽에 이쓴 마을, 구암리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아래쪽에 있음.
4. 기타지명
- 가운데-동산[산] 아랫말 서쪽에 있는 동산, 큰동산과 끝에 동산 사이에 있음.
- 고봉-동산(孤峰- )[산] 중뜸 동쪽에 있는 산. 높이 150m. 들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음.
- 구레-보[보] 중뜸 동쪽에 있는 보. 삼가천을 막아 백년구렁에 물을 대고 있음.
- 구레보-들[들] 구암 동쪽에 있는 들. 들이 소 구레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함.
- 구-바우(龜岩 九岩 귀바위, 거북바위)[바위] 구바우 이상규씨댁 마당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조선시대에는 구암(龜岩)이라 불리워 왔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큰 바위가 아홉 개가 있어 구암(九岩)이라 함. 경지정리 사업으로 4개는 없어지고 현재 5개만 남아있으며, 구암리는 이 바위에 의하여 부르게 된 이름임.
- 구정부리[내] 대냇물(報靑川)과 삼가천이 합수되는 곳.
- 끝에-동산[산] 아랫말 서남쪽에 있는 동산, 높이 143m로 큰 동산에 비하여 “작은동산”이라고도 함.
- 대-냇물(竹川, 報靑川)[내] 구암리 남쪽에 있는 냇물로 보청천을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임
- 동오리-산[산] 구암 서남쪽에 이쓴 산. 높이 153m. 산 모양이 오리가 서 있는 것같다 함. 들한복판에 5개가 모여있음.
- 바위배기-밭[밭] 안말과 귀바위 사이에 있는 밭. 큰 바위가 있음.
- 백년-골(百年谷, 박로들)[들] 아랫말 주위에 있는 들. 백년동안 가물어도 물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물이 흔하다 함.
- 새-들(新坪)[들] 아랫말 동남쪽에 있는 들. 구암리의 들 중 가장 늦게 개간한 들이라고 함.
- 새-장터[터] 귀바위에 있는 터. 해방후 시장을 유차하기 위해 장터를 만들었으나 폐쇄되어 공터로 남아있음.
- 용-바우[바위] 중뜸 동쪽 용보동산 밑에 있는 바위. 용보 옆에 있으며, 전에 정월 보름이면 동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함.
- 용-보(龍洑)[보] 용보동산 밑에 있는 보. 삼가천을 막아 용보들에 물을 대고 있음.
- 용보-들(龍洑坪)[들] 중뜸 동쪽에 있는 들.
- 용보-동산[산] 중뜸 동쪽에 있는 산. 밑에 용보가 있음.
- 큰-동산[산] 아랫말 서쪽에 있는 산.
5. 문화유산
- 지석묘군(支石墓群)
속칭 “거북바위” 또는 "구바우“라고 불리우는 지석묘다. 본래 9개였으나 경지정리때 파괴되거나 땅속에 묻히고 현재 5개가 남아있다.
귀바위 마을 중심에 자리한 이상규씨 집의 안마당가 있는 것부터 남쪽으로 가면서 각각 1~5호로 명명하여 살펴보면 제 1호는 비교적 잘 보존이 되어 있는데 편마암으로 길이 235cm, 너미 190cm, 두께 57cm의 개석(개석)으로 장축방향은 정남북 방향이다.
제 2호는 이상규씨 집 사랑채 뜰과 마루밑에 걸쳐 있으며, 길이 215cm, 너비 150cm, 두께18cm 편마암으로 북서향으로 놓여 있다.
제 3호는 제 2호에서 남쪽으로 3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길이 215cm, 너비172cm, 두께115cm이다.
제 4호는 제 3호 동쪽에 거의붙어 있으며, 길이 155cm, 너비 275cm, 두께 115cm이다.
제 5호는 남으로 약 100m 떨어진 민묘 옆에 있으며, 길이 150cm, 너비 130cm, 두께 196cm이며 3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제 1호 지석묘는 특히 “거북바위”라 부르며 해가 바뀔 때, 햇곡식이 날 때,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음식을 차려놓는다고 한다.
- 가평이씨 비각터(加平李氏 碑閣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적암리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절한 이명백(이명백)의 충절을 기리는 정각으로 1812년(순조 12)에 명정되어 건립하였으나, 1892년 헐고 하장리로 이건하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6. 산업
쌀
7. 기타
1997년 마을 유래비를 안말에 세웠다.
대양리(大陽里)
1. 위치
면적 3.99㎢, 인구 101가구 269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5㎞ 지점인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마로면( 馬老面), 서는 성지리(城池里), 북은 덕동(德洞), 벽지(碧池), 하장(下長), 구암리(九岩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마로면(馬老面)지역으로서 운무산(雲霧山) 아래 있어 햇볕이 적음으로 태양을 그리워한다 하여 대양(大陽) 또는 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양리(大陽里)라 해서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골-말[마을] 수피 중앙을 흐르는 도랑 서쪽에 있는 마을. 골이 졌음.
- 넘은-골[마을] 수피 중앙을 흐르는 도랑 동쪽에 있는 마을. 도랑 너머에 있음.
- 수피(大陽, 댕이)[마을] 냇가에 있는 마을로 전에 숲이 우거졌었다 함. 잿마당, 골말, 넘은골을 통틀어 수피라고 부름. “숲이”가 변한 것임.
- 잿-말(잿마당) 수피에서 제일 지대가 높은 마을로 뒷산 애기바우 밑에 있음. 산밑에 있기 때문에 “잿마당”이라고도 함.
4. 기타지명
- 가-골[골] 수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멱적골 남쪽이 됨.
- 가는-골[골] 수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큰골 서쪽에 있음.
- 골말-재[고개] 골말에서 마로면 오천리 오그내로 넘어가는 고개. 고갯마루에 배나무가 있음.
- 대양-들[들] 수피 북쪽에 있는 들. 마을 앞이 됨.
- 돼지-골[골] 수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가는골 서쪽에 있음.
- 맞바우-들[들] 수피 서북쪽에 있는 들. 덕동교를 중심으로 덕동쪽에 있는 바위와 성지쪽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어 그 사이에 있다하여 맞바우들이라 부름.
- 매방-골[골] 수피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응골 아래에 있음. 마로면 기대리와 경계가 됨. 천지개벽시 산소 1개 정도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물에 잠겼다 함.
- 멱적-골(目的谷)[골] 수피 서쪽 샘물 안에 있는 골짜기.
- 멱적골-못[못] 수피 서쪽 멱적골 아래 있는 못. 샘골에 물을 댐.
- 문앞-다리[다리] 수피 앞에 있는 다리. 보청천을 가로지른 다리로 “대양교”라고 부르며 마을 진입로가 됨.
- 밭-골[골] 수피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는 밭이 있었으나 묵어서 산림이 우거졌다고 함.
- 배나무-골[골] 돌배나무가 많이 있다고 함.
- 보-들[들] 수피 북쪽 마을 앞에 있는 들. 탄부면 장암리앞에 있는 수피봇물을 용수하여 농사를 지음.
- 비조-재(飛鳥峙)[고개] 수피에서 마로면 오천리로 가는 고개. 새떼가 많이 살았다고 함.
- 비지재-골[골] 수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비조재 길목임.
- 새반두[고개] 수피 남쪽에 있는 고개. 오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임.
- 새반두-골[골] 수피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새반두 고개 길목임.
- 샘-골[골] 수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샘이 많았음. 오래 전에 마을이 있었으나 마적떼 때문에 모두 수피로 이주했다고 함.
- 샘골-못[못] 수피 서쪽 샘골에 있는 못 “멱적골못”이라고도 부름.
- 섬-들[들] 장마가 지면 섬같이 고립이 된다고 함.
- 송-골(松谷)[골] 수피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수피-둥구나무[나무] 수피 마을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로 둘레가 세 아름정도 됨.
- 앞-냇물[내] 수피 앞으로 흐르는 내. 보청천을 말함.
- 애기-바우[바위] 수피 뒷산에 있는 바위.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포개져 있는데 그 모양이 어머니가 아기를 업은 것 같음.
- 오리-미[산] 수피 동쪽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오리의 꼬리같음.
- 을미-산(雲霧山:450m)[산] 수피 동남쪽에 있는 산. 구름속에 싸여있는 것 같다 함.
- 을미산-들[들] 수피 동쪽에 있는 들. 을미산 아래가 됨.
- 옻-샘[샘] 넘은골 동쪽에 있는 약수터 옻 오른데 좋다 함.
- 응-골[골] 수피 동쪽에 있는 골짜기. 밭골과 매방골 사이에 있음.
- 절-골[골] 절이 있었다 함.
- 큰-골[골] 수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크고 깊음.
5. 집성
6. 산업
쌀, 고추
덕동리(德洞里)
1. 위치
면적 2.86㎢, 인구 72가구 200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남서쪽 2㎞ 지점으로 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벽지리(碧池里), 서는 장암리(壯岩里), 남은 성지리(城池里), 북은 매화리(梅花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탄부면(炭釜面)의 지역으로서 언덕에 자리잡아 덕골 또는 덕동(德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화리(石花里)를 병합하여 덕동리(德洞里)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덕골(德洞)[마을] 덕동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덕동 1리 마을임.
- 돌-고지(石花)[마을] 덕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 “돌꽃이”가 변하여 “돌꼬지”라 부른다. 덕동 2리 마을이다.
- 삼성-골(三姓- )[마을] 덕골 북쪽에 있는 마을.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으로 신라 장수 3명이 피난하였던 곳이라 함.
- 새-터[마을] 덕골 남쪽에 있는 마을. 새로 형성된 마을로 탄부초등학교가 있다.
4. 기타지명
- 국사-봉(國仕峯:363m)[산] 덕골 북쪽에 있는 산. 사보우리가 국자모양같이 생겼다 함.
- 굴-바우[바위] 덕골 북쪽 찬샘위에 있는 바위. 바위에 구멍이 뚫어져 있다 함.
- 너븐-바우[바위] 덕골 동쪽에 있는 널따란 바위.
- 다랑-골[골] 덕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떡-고개[고개] 돌꼬지에서 덕골로 가는 고개.
- 떡고개-들[들] 돌꼬지 동쪽에 있는 들. 떡고개 아래에 있음.
- 덕동-들[들] 덕골 남쪽에 있는 들. 탄부초등학교앞 들임.
- 도래-샘[우물] 덕골 북쪽에 있는 샘. 사람들이 그곳을 돌아서 다니므로 도래샘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음.
- 도룡태-봉[산] 덕골 서쪽에 있는 산. 산을 중심으로 길게 돌아가게 되어 붙여진 이름인다. 지금은 ‘돌머리산’이라 부르고 있음.
- 동경-터[골] 덕골 서쪽에 있는 골짝. 마을 중심에 있음.
- 못구렁-들[들] 돌꼬지 남쪽에 있는 들. 마을 어귀가 됨.
- 삼산-골[골] 돌꼬지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삼성-혈(三姓穴)[굴] 덕골 북쪽에 있는 바위. 위로는 지붕과 같이 덮여있고 아래는 텅빈 구멍이 있다. 즉 사람이 사는 집의 온돌과 흡사하게 생겼음. 임진왜란 때 덕동리에 살고 있었던 청송심씨, 가평이씨, 김해김씨, 세성씨 집안 식구가 동시에 이 굴에서 피난하였다고 굴을 말할때는 “삼성혈” 바위를 말할대는 “삼성암(三姓岩)”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인데 신라장ㅇ수 3명이 이 굴에서 피난하였다 하여 “장수굴”이라고도 부른다.
- 삼성-골[골] 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삼성혈이 있음.
- 새제-고개[고개] 덕골에서 장암리 장바우로 넘어가는 고개. 세 번째 있는 고개로 가장 크다고 함.
- 새제-들(보들)[들] 돌꼬지 남쪽에 있는 들.봇물로 농사를 짓는 들이라 해서 ‘보들’이라고도 부름 새제고개 너머에 있음.
- 석화-소류지[못] 돌꼬지 북쪽에 있는 못.
- 장-고개[고개] 돌꼬지에서 매화리로 넘어가는 고개. 장을 보기 위해 넘어가는 고개라 함.
- 절터-골[골] 돌꼬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 찬-샘[우물] 도래샘 북쪽에 있는 찬 샘.
- 청룡-재[고개] 돌꼬지에서 벽지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 청룡이 승천했다고 함.
- 평웅-바우[바위] 덕골 북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병풍처럼 생겼다 함.
5. 문화유적
- 충훈사(충훈사)
덕동리 산 22번지 탄부초등학교 뒤에 있는 적개공신(敵愾功臣) 가평인(加平人) 이형손(李亨孫)의 부조묘(不祧廟), 1890년(고종 2) 충남 연산에서 덕동리 135번지로 이건하였다가 1987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음. 1992년 경내에 보훈재(報勳齋)라는 재실을 신축하였다.
- 모성재(慕誠齋)
돌꼬지에 있는 가평인(加平人) 사직서령(社稷署令) 이장보(李長補)의 재실로 1978년에 건립되었다.
- 이명백묘(李命百墓)
충훈사 옆에 있는 임진왜란 시 의병장인 가평인(加平人) 이명백(李命百)의 묘소로 처음 마로면 원정리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천장하고 묘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
6. 집성
- 가평이씨(加平李氏)
가평군(嘉平君) 후손 20여호 거주
7. 산업
쌀
8. 기타
1995년 탄부초등학교 입구 지방도 502호선 변에 마을 유래비를 세웠다.
매화리(梅花里)
1. 위치
면적 2.21㎢, 인구 62가구 174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 6㎞지점인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벽지리(碧池里), 서는 사직리(士直里), 남은 장암(壯岩), 덕동리(德洞里), 북은 평각리(坪角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사각면(思角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매화처럼 생겼으므로 매화(梅花)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부리(羅浮里), 운현리(云峴里)를 병합하여 매화리(梅花里)라 하고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나비(羅浮里)[마을] 매화 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매화꽃에 나비가 앉은 것 같다함. 매화 1리의 중심 마을임.
- 띠-실(?谷)[마을] 나비 남쪽에 있는 마을. 매화 2리의 중심마을임. 띠가 많이 있다 함.
- 바깥-나비[마을] 나비 가운데 등성이의 북쪽에 있는 마을.
- 상-매화(上梅花)[마을] 나비 마을의 다른 이름.
- 섶-바탕[마을] 띠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 구름이 많이 끼는 고개가 있어 신무리라 부르고 운현(云峴)이라고도 함.
- 안나비[마을] 나비 남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
- 자박-골[마을] 띠실 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자라의 등과 같다고 자래골이라고도 함.
4. 기타지명
- 가마-바위[바위] 안나비 동쪽 산에 있는 바위. 가마처럼 생겼다 함.
- 고승보-들[들] 섶바탕 서쪽에 있는 들. 개울 안쪽이 됨.
- 관논-들[들] 나비 북쪽에 있는 들.
- 꽃밭-재[고개] 띠실에서 덕동리 석화로 넘어가는 고개.
- 구름-고개(云峴)[고개] 신무리 북쪽에 있는 나비로 넘어가는 고개.
- 내미-재(羅彌現, 나비재)[고개] 나비에서 상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남매가 이 고개를 넘다가 비를 만나게 되었는데 앞서가던 누이동생의 옷이 몸에 들어붙은 것을 본 오빠가 성욕이 발동하였지만 차마 누이동생을 어찌할 수가 없어 “남이라면 차라리 좋겠는데”하면서 자신의 성기를 돌로 찧고 자살했다고 함.
- 넘은-골[골] 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골짜기만 남아있음.
- 노랭이-골[골] 바깥나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돈논-방죽[못] 나비 동남쪽에 있는 방죽, 돼지머리 형국이라 함.
- 돈논-주막거리[거리] 나비 북쪽 평각리에 있는 거리. 장꾼들이 관기장을 보고 새골재를 넘어 보은으로 가던 길목임. 삼가 저수지 용수로가 이곳을 지나게 되자 철거되고 수로가 되었음.
- 돌꼬지-재(石花- )[고개] 나비에서 덕동리 석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 매방-골[골] 나비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밑에보-들[들] 섶바탕 북쪽에 있는 들. 영평들 밑에 있음.
- 무심이-골[골] 나비동쪽에 있는 골짜기.
- 바람-부리[골] 나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대가높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함.
- 바람부리-고개[고개] 나비에서 벽지리로 넘어가는 고개.
- 바람불이-산[산] 자박골 동쪽에 있는 산.
- 부처-골[골] 나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절이 있었다 함.
- 서당-골[골] 나비 북쪽에 있는 골짝. 매방골 아래가 됨. 전에 서당이 있었다고 함.
- 섶밭-들[들] 섶바탕 동쪽에 있는 들. 전에는 미루나무가 숲을 이루어 우거져 있었다고 함.
- 소지랑-가지골[골] 안나비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쇠스랑-가지[바위] 안나비동쪽 산에 있는 바위. 쇠스랑 같이 생겼다 함.
- 신무리-골[들] 신무리 마을 남쪽앞에 있는 들.
- 영평-들[들] 섶바탕 북쪽에 있는 들.
- 영평-보[보] 섶바탕과 나비 사이에 있던 보. 삼가저수지 용수로가 지나면서 없어졌음.
- 영평-주막거리[거리] 매화 1리에서 매화 2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거리로 전에 주막이 있었음.
- 자밭-골[들] 나비 서쪽에 있는 들.
- 장터-골[들] 자박골 남쪽 마을앞에 있는 들.
5. 문화유적
- 매선재(梅宣齋)
나비에 있음. 문화인(文化人) 선전관(宣傳官) 유간종(柳澗宗)의 묘소아래 있는 재실임. 1989년에 건립되었으며 경내의 후손 영모(英模)가 쓴 묘갈비가 있다.
- 학산선생경주김공휘명구추모비(鶴山先生慶州金公諱鳴九追慕碑)
자박골에 있는 근대유학자인 학산(鶴山)선생의 추모비로 1972년 문하생이 건립한 비로 매년 음3월에 추모제가 거행되고 있음.
- 김공홍익유공재석공적비(金公洪翊柳公在錫功績碑)
마을 농장 창설한 공을 기리기 위하여 1986년 나비앞 도로변에 세움.
6. 산업
쌀
7. 기타
1995년 섶마당에 매화 2리 마을 자랑비를 세움
- 매화 8경(梅花八景)
- 오담춘수(吳潭春水) : 오담연못의 고기떼와 봄의 물결
- 이악하운(離岳夏雲) : 속리산의 여름 구름
- 마현상풍(馬峴霜楓) : 말티재의 서리를 맞고 있는 단풍
- 저동설송(猪洞雪松) : 평각리 돈논의 눈맞은 소나무
- 나부효월(羅浮曉月) : 나비마을의 새벽달
- 금적석휘(金積夕暉) : 금적산 석양
- 사봉초객(沙峰樵客) : 사봉의 나그네
- 석전경수(石田耕叟) : 돌밭을 갈고 있는 늙은이 모습
벽지리(碧池里)
1. 위치
면적 2.57㎢, 인구 75가구 217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서쪽으로 2㎞지점인 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하장리(下長里), 서는 덕동리(德洞里), 남은 대양리(大陽里), 북은 상장리(上長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탄부면(炭釜面)의 지역으로서 벽처럼 생긴 산이 뒤에 있으므로 벽디 또는 벽지(碧池)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벽지리(碧池里)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원-벽지(元碧池)[마을] 벽지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 찻-골(찻골)[마을] 벽지 서쪽에 있는 마을. 차씨가 살았다고 함.
4. 기타지명
- 가장-골[골] 찻골 찻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감나무-골[골] 벽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감나무가 많았음.
- 꼬부랑-길[길] 찻골에서 생대골로 가는 길.
- 대밭-골[골] 벽지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등넘어[골] 벽지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못앞-들[들] 벽지못 남쪽에 있는 들. 벽지 마을 앞에 있어 ‘벽지앞들’이라고도 함
- 바람-부리[산] 벽지 서쪽에 있는 산. 바람을 막아준다 함.
- 벽지-숲[숲] 벽지 동나목에 있는 숲. 들 가운데 있음.
- 사모-바우[바위] 벽지 북쪽에 있는 바위. 사모같이 생겼다 함.
- 생대-골(生竹谷 생지골)[골] 서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땅이 기름져 무엇이든지 잘 되었다고 함.
- 서당-골[골] 벽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이 있었다고 함.
- 선-골[골] 찻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수반[들] 벽지숲 북쪽에 있는 들. 숲의 안쪽에 있다 하여 ‘숲안’이 변한 것임.
- 아갈-바우[바위] 찻골 남쪽산에 있는 바위.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마을을 바라보고 있어 찰흙으로 메우었다 함.
- 안-골[골] 벽지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엄시무-골[골] 벽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외솥-들[바깥속리들] 벽지 동쪽에 있는 들. 큰 소나무가 외따로 있어 ‘외솥들’이라고도 하고 속리산 천황봉 물이 삼거리에서 내려와 그물을 대는 논이라 ‘바깥속리들’ 또는 ‘외속리들’이라고도 함.
- 장-고개[고개] 찻골에서 보은장을 보러갈 때 넘어가는 고개.
- 절-골[골] 찻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 함.
- 찬-샘[샘] 벽지리 북쪽 국사봉 아래에 있는 옹달샘. 찬샘골에 있으며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 함.
- 홍-골[골] 찻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5. 집성
- 남원양씨(南原梁氏)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양도(梁道)의 후손으로 17호가 거주하고 있음.
- 가평이씨(加平李氏)
가평군(嘉平君) 이형손(李亨孫)의 후손 20여호가 거주하고 있음.
6. 산업
쌀
7. 전설
- 찬샘
보은군 탄부면 벽지리 윗산이 국사봉이고, 이 산 아래 약 6평 가량의 평평한 바위가 깔려 있고 그 바위 중간에 조그만 옹달샘이 있는데 ‘찬샘’이라 부른다.
조선 중엽 경상도 사람이 몸에 못된 피부병을 얻어 고생을 하더 중 충청도 충주에 가서 온수에 목욕을 하면 피부병에 특효라는 소문을 듣고 충주를 향하여 가던 중 이곳을 지나가다 여름날씨에 덥기는 하고 해서 앉아 쉬어갈 곳을 찾고 있었는데 이곳에 평평한 바위가 있고 옹달샘까지 이쓴 것을 발견하고 바위로 내려가 물을 한모금 마셨더니 속이 후련하고 상쾌하기이를데업섰다. 그는 그 물을 한 모금 더 마시자 정신마저 개운해 지는 것을 느끼자 하룻밤을 바위에서 자면서 날이 어두워지면 그 시원한 물로 목욕을 한번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날밤 그는 시원한 바위에서옷을 벗어놓고 옹달샘에서 물을 퍼서 목욕을 했는데 물을 한바기 몸에 들어부은 그는 뛸 것만 같은 따가움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물이 상처에 닿자 종기가 난 곳이 흡사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 따가운 통증을 느꼈던 것인데 이내 진정이 되었다. 목욕을 다하고 나자 그는 평생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자게 되었고 이튼날 아침 눈을 뜬 그는 기적적인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그토록 오래도록 앓고 있던 종기가 말라 붙어지면서 아픔이 없어지기 시작한 사실이다. 그는 필시 이 샘물로 목욕을 한 덕분이라 생각을 하고 그날로 바위위에 천막을 치고 그 물을 마시고 목욕하기를 불과 7일만에 피부병을 말끔히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와같은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 있는피부병 환자가 이곳을 앞다투어 찾아왔고 특히 삼복더위에 효력이 영험함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여름 삼복더위에 이곳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직리(士直里)
1. 위치
면적 1.38㎢, 인구 68가구 185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 6㎞지점으로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매화리(梅花里), 서는 고승리(高升里), 남은 장암리(壯岩里), 북은 평각리(坪角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사각면(思角面)지역으로서 예전에 사직단(社稷壇)이 있었으므로 사직(社稷)또는 사직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직리(士直里)라 해서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구름샘이[마을] 큰말 북쪽에 있는 마을.
- 사직(士直)[마을] 새말 뒤에 사직단이 있어 사직(社稷)이라 불렀다고 함. 큰마을과 새마을 사이에 있는 야산이 옛날에 사형터였는데 사람이 들어오면 직사를 한다하여 ‘직사’라 칭하다가 나중에 사직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도 함.
- 새-말(新洞)[마을] 큰말 동쪽에 있는 마을. 현재 시작분교가 있음.
- 아랫-말[마을] 사직 남쪽 도로변에 있는 마을.
- 큰-말[마을] 사직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4. 기타지명
- 광대-산[산] 구름샘이 동북쪽에 있는 산. 매화리와 경계에 있음. 전에 광대를 불러다 놀이를 하던 곳이라 함.
- 광대산머리-들[들] 구름샘이 동북쪽에 있는 들. 광대산 남쪽 아래가 됨.
- 낭근터-골[골] 구름샘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마을이 있어 오씨, 금씨, 장씨가 살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 능마-골[골] 구름샘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낭근터골 북쪽에 있음.
- 댓-마루[버덩] 새말과 구름샘이 사이에 있는 버덩. 배혈(舟穴)이라 함.
- 매화-들[들] 큰말 남쪽에 있는 들. 사직앞들 남쪽임.
- 발티-골[골] 구름샘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채실옆에 있음.
- 사직앞-들[들] 큰말 남쪽에 있는 들.
- 사직-저수지(士直貯水池)[못] 사직동북쪽에 있던 저수지, 현재는 없어지고 논으로 변하였음.
- 새골-재[고개] 사직에서 평각리로 넘어가는 고개. 새로운 마을로 가는 고개라 하여 새골재라 함.
- 아래-고개[고개] 큰말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 중고개 아래에 있음.
- 아랑뱅이-골[들] 새말 동쪽에 있는 들.
- 안막이-골[골] 구름샘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오금장-재[터] 낭근터골 안에 있는 집터자리, 전에 오씨, 금씨, 장씨 집이 있었다고 함.
- 왜곡-들[들] 큰말 서쪽에 있는 들.
- 요-댕이[터] 낭근터골 끝에 있는 터. 요댕이 고개 너머 못이 있었는데 용왕신을 모시는 당집이 이곳에 있었다고 함. 용당이 변한것임
- 오댕이-고개[고개] 낭근터골에서 보은읍 월송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장터-들[들] 낭그너골 동쪽에 있는 들. 옛날에 장이 섰던 자리라고 하나 지금은 전답으로 변하였음. 저수지 공사 때 두길 이상 땅을 파고 보니 그 속에서 우물자리가 여러 곳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함. 광대산머리들 남쪽임.
- 중-고개[고개] 큰말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
- 청룡(靑龍)[등] 큰말 좌측에있는 등성이. 좌청룡에 해당됨.
- 채실-골[골] 구름샘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채실산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임.
- 채실-산[산] 구름샘이 동북쪽에 있난 산. 귀(箕)를 엎어놓은 것같아 “귀실산”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채실산”이 됨.
- 하까밭-모링이[모롱이] 고승리와 사직리 경계에 있는 모롱이. 고승리에서는 “윤모랭이”라고 부름. 이 모롱이에 밭이 있는데 이 밭을 살까 말까 망설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함.
5. 문화유적
- 사직단지(社稷壇址)
옛 보은현감이 관할하던 사직단터로 새말 뒷산에 있다. 흔적은 없고 현재는 마을의 산제당이 있음.
- 열녀비각지(烈女碑閣址)
문화인(文化人) 유치봉(柳致鳳)의 처 경주이씨(慶州李氏)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인조때 세운 정문이였으나, 해방이후 헐리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음. 새말 앞에 있음.
- 성암어선생휘녕우유허비(省菴魚先生諱寗愚遺墟碑)
근대 유학자 어녕우(魚寗愚)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 큰말 서쪽에 세움.
- 김준기공적비(金俊基功績碑)
유아원부지를 희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 세움
6. 산업
쌀, 고구마
7. 기타
1997년 마을 입구에 마을자랑비를 세웠음.
- 직하8경(稷下八景)근대의 유학자 성암(省菴) 어선생(魚先生)과 학산(鶴山) 김선생(金先生)이 읊은 것으로 다음과 같음.
- 구병조일(九屛朝日) : 구병산의 아침해
- 삼승석조(三升石照) : 삼승쪽의 석양
- 금화백운(金華白雲) : 금화사의 흰구름
- 나부명월(羅浮明月) : 나비마을에 떠 있는 밝은 달.
- 남교감우(南郊甘雨) : 남쪽 들판에 나리는 비
- 북창청풍(北窓淸風) : 북쪽 창문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
- 죽천어화(竹川漁火) : 대내의 어부들의 횃불
- 국수초가(菊峀樵歌) : 국화핀 바위에서 부르는 나무꾼의 노래소리
상장리(上長里)
1. 위치
면적 4.53㎢, 인구 94가구 250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4㎞ 지점인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외속리면(外俗離面)과 임한리(林閑里), 서는 매화리(梅花里)와 평각리(坪角里), 남은 벽지리(碧池里)와 하장리(下長里), 북은 외속리면(外俗里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탄부면(炭釜面)의 지역으로서 긴메 위쪽이 되므로 윗진미 또는 상장산(上長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덕리(至德里)와 속리면(俗里面)의 애평리(艾坪里)를 병합하여 상장리(上長里)라 하고 면 소재지가 되었다가 얼마후 하장리에 넘겨주었다.
3. 자연마을
- 건너-마[마을] 주초배기에 딸린 마을. 주초배기 동쪽 장군들에 있음.
- 샛-터[마을] 주초배기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
- 숫-돌(艾坪, 쑥들)[마을] 지디기 동북쪽에 있는 마을, 국도 25호선 옆에 있음. 전에 숫돌이 많았다고도 하고, 고려시대 절터였으나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으로 절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쑥이 많이 났기 때문에 쑥들이라 부른다 함.
- 주초-배기(上長山, 위진미)[마을] 지디기 남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살기가 좋다하여 집을 짓기 위해주초돌을 박아놓고 있던 중 다른 곳이 더 살기 좋아 주춧돌만 박아놓고 다른 곳으로 갔다 하여 “주초배기”라 부른다고 함. 상장 1리의 중심마을.
- 안-마[마을] 주초배기에 딸린 마을. 주초배기 서남쪽에 있음.
- 중간-마[마을] 주초배기에 딸린 마을. 주초배기와 샛터 중간에 있음.
- 지디기(至德里, 지덕이)[마을] 숫돌 서쪽에 있는 마을, 덕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함. 상장 1리의 중심마을.
4. 기타지명
- 남서-고개[고개] 지디기에서 평각리 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지디기에서 보면 고개가 남서쪽으로 있다하여 ‘남서고개’라 부른다고 하나 실은 북서쪽이 됨.
- 넘마-골[골] 주초배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생죽골에 딸린 골짜기임.
- 다래단박-골[골] 주초배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생죽골에 딸린 골짜기임.
- 말-무지(말무덤골)[골] 지디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말꼬리처럼 능선이 길다고도 하며, 골 안에 말 무덤이 있었다고도 함.
- 매봉-산[산] 지디기 북쪽에 있는 산. 지디기 못 위에 있는 높이 218미터의 산.
- 못위-들[들] 지디기 서쪽에 있는 들. 지디기 못 위에 있음.
- 상장-들[들] 지디기 동쪽에 있는 들.
- 새한-들[들] 샛터 동쪽에 있는 들.
- 생죽-골[골] 지디기 남쪽에 있는 골짜기. 무엇이든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 골짜기에서 소리지르고 나면 그 뒤 이루어졌다고 해서 “성대골”이라고도 하며 국사봉까지 이어짐.
- 소먹이-골[골] 지디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풀이 많아서 소를 많이 뜯기던 골짜기라 함.
- 소태-골[골] 지디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지디기 못 위에까지 이어짐.
- 숫돌-보[보] 숫돌 동쪽에 있는 보. 삼가천에 있으며 숫돌 앞들에 사용함.
- 숫돌앞-들[들] 숫돌 남쪽에 있는 들. 숫돌 마을 앞이 됨.
- 아홉-마지기[논] 지디기 서북쪽에 있는 논. 지디기못 서쪽에 있음.
- 안마-골[골] 주초배기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 장군-들[들] 주초배기 동쪽에 있는 들.
- 좁은-골[골] 지디기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주라-골[골] 주초배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죽다리-골[골] 주초배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생죽골에 딸린 골짜기.
- 지디기-못(池德貯水池)[못] 지디기 서북쪽에 있는 못.
- 질-구뎅이[들] 지디기 동쪽에 있는 들. 질흙이 많음.
- 큰-골[골] 지디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지디기못 아래에 있음.
- 한자-골[골] 숫돌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선비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던 골짜기라 함.
5. 산업
쌀
성지리(城池里)
1. 위치
면적 1.91㎢, 인구 32가구 76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남서쪽 3㎞ 지점으로 면의 남부에 위치하며, 동은 대양리(大陽里), 서는 삼승면(三升面), 남은 마로면(馬老面), 북은 덕동리(德洞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마로면(馬老面)지역으로서 망지 또는 성지(城池)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쌍암리(雙岩里)를 병합하여 성지리(城池里)라 해서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망-지(綱池)[마을] 마을의 지형이 못에 그물을 친 것 같다 하여 망지라 하였다고 함. 일설에는 기름재에 명당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노승이 묘를 쓰지 못하도록 엄나무 말목 4개를 박고 갔는데 그것이자라 세 아름이 되었는데 그중 세그루가 불에 타나 인업이 비지재를 넘어 간 후 마을이 작아지고 하는 일이 풀리지 않아 망지라 하였다고 함.
- 맞-바우(雙岩)[마을] 망지 북쪽에 있는 마을. 현재는 한 집만 있음.
- 새텃-말(新村)[마을] 망지 서쪽에 있는 마을. 성지리 4개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겼음.
- 작은-망지[마을] 망지에 딸린 작은 마을. 큰 망지 서쪽에 있음.
- 큰-망지[마을] 망지에 딸린 큰 마을. 성지리의 중심 마을임.
4. 기타지명
- 기름-재[고개] 큰 망지와 작은 망지 사이에 있는 고개. 엄나무 네 그루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한 그루만 남아 있음.
- 갈밭-들[들] 맞바우 서쪽에 있는 들. 망지마을 북쪽으로 마을 앞이 됨.
- 골안-골[골] 큰 망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
- 국시기-고개[고개] 큰 망지 북동쪽에 있으며, 대양리로 넘어가는 고개.
- 국시기-골[골] 큰 망지 동북쪽 국시기 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너른-골[골] 큰 망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 소류지 위로 골안골 동쪽임.
- 덕-골[골] 큰 망지 동남쪽 소류지 위에 있는 골짜기.
- 등투-고개[고개] 큰 망지 동남쪽에 있는 고개. 마로면 오천리로 넘어가는 길목임. 가름재에 있었던 엄나무 세 그루가 불에 탄 후 인업이 이 고개를 거쳐 비지재로 넘어간 후 마을이 작아지고 일이 잘 안된다고 함.
- 매-봉[산] 큰 망지 동쪽에 있는 283미터의 산. 옛날 큰 홍수 때 모두 침수되고 매 한 마리 만큼 남았다고 함. “독수리봉”이라고도 함.
- 모롱[모롱이] 새텃말 북쪽에 있는 모롱이. 망지 사람들이 원남장을 보러 갈 때 다니던 길목임.
- 모롱-들[들] 새텃말 북쪽에 있는 들. 모롱 안쪽에 있음.
- 뭇-터[들] 망지북쪽에 있는 들. 갈밭들 넘어 보청천가에 있음.
- 배선지-골[골] 큰 망지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망지에 100여호가 살고 있을 때 전쟁이 나서 마을 주민 천명이 이곳으로 피난했다가 백명만 살아 나왔다고 함.
- 산지-당[당] 작은 망지 남쪽에 있는 당집. 음력 섣달 초사흩날 부락제를 지냈으나 1973년 이후 중단하고 있음.
- 선지-골[골] 새터말 뒤에 있는 골짜기. 논의 토질이 좋아 한 평을 팔면 들톀의 논 3~4평을 살 정도였다고 하나 지금은 폐답이 되었다고 함.
- 송-골[골] 큰 망지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소류지 위 가운데 골짜기로 덕골과 너른골 사이에 있음.
- 중종-골[골] 작은 망지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고 함.
- 지안-터[들] 맞바우와 큰 망지 사이에 있는 들. 전에는 인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농경지로 변했음. 모두 선씨, 서씨, 김씨, 장씨의 위토답으로 되어 있어 “귀신답”이라고도 하고 “집넘어들”이라고도부름.
- 호랭이-산태[산] 큰 망지 남쪽 산지당 옆에 있는 산. 사태가 크게 났었는데 그 모양이 멀리서 보면 호랑이와 같이 생겼다고 함. 혀재는 사방사업으로 나무가 울창함. 나무를 심으면 마을이 흥한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나무를 심었으나 조림후 마을이 더작아졌다고 함.
- 황새-바우[바위] 망지에 있는 바위. 황새가 날아가다가 바위에 앉아 쉬어갔다고 함.
5. 산업
쌀
6. 기타
1996년 마을유래비를 세움.
임한리(林閑里)
1. 위치
면적 1.52㎢, 인구 72가구 160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3㎞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마로면(馬老面), 서는 하장리(下長里)와 상장리(上長里), 남은 구암리(九岩里), 북은 외속리면(外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옛 조선시대 상주목(尙州牧)의 임언부곡(林堰部曲)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뒤에 보은군(報恩郡) 왕래면(旺來面) 관할지역으로서 숲이 많으므로 임한이 또한 임한(林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임한리(林閑里)라 해서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아랫-말[마을] 임한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웃말 아래쪽에 있음.
- 웃-말[마을] 아랫말 북쪽, 숲밑에 있는 마을.
- 임한(林閑, 임한이)[마을] 숲이 많이 우거졌다 하여 임한이라 함.
4. 기타지명
- 매봉-재[산] 아랫말 동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
- 사통-들[들] 임한이 북동쪽 삼가천 건너에 있는 들.
- 새-들[들] 임한이 북쪽에 있는 들.
- 예기-소[소] 삼가천이 있는 웅덩이 80년 수해로 메워지고 지금은 볼 수가 없음.
- 임한이-앞들[들] 아랫말 앞 도로 건너에 있는 들.
- 임한이-숲[숲] 아랫말 북쪽, 윗말 뒤에 있는 소나무 숲.
- 함박-소[소] 임한이 뒤, 삼가천에 있는 소
5. 문화유적
- 경모재(景慕齋)와 임천정(林泉亭)
기계유씨(杞溪兪氏) 문중의 재실과 제각이다. 1958년에 건립한 재실 경모재는 전면 4칸반, 옆면 1칸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병찬(炳瓚)의 “경모재기”와 1967년 병수(炳壽)가 쓴 “경모재찬시”가 편액되어 있다.
제각인 임천정은 전면 4칸 옆면 2칸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1959년에 채기연(蔡基演)이 짓고 병극(炳極)이 쓴 ‘임천정서’가 편액되어 있다.
- 기계후인유병찬씨영세불망비(杞溪后人兪炳瓚氏永世不忘碑)
1936년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로 아랫말에 있다.
- 당운유창식선생공적비(塘雲兪昌植先生功績碑)
육영사업과 치수사업 등 공적을 기리는 비로 면민들이 1990년에 세웠다.
- 충목공송당유선생광국사적비(忠穆公松塘兪先生光國事績碑)
선조때 좌의정(左議政) 유홍(兪泓)의 광국훈공(光國勳功)의 사적을 기록한 비로 1998년 후손들이 숲속에 세웠다.
- 민속
산신제 : 마을앞 숲속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열나흩날 산신제를 거행하고 있음.
6. 집성
- 기계유씨(杞溪兪氏)
좌의정(左議政) 충목공(忠穆公) 유홍(兪泓)의 후예 20여호가 거주하고 있다.
7. 산업
쌀
8. 기타
1992년 마을 자랑비를 마을회관 앞에 세웠다.
장암리(壯岩里)
1. 위치
면적 1,72㎢, 인구 74가구 239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서쪽으로 4㎞ 지점으로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덕동리(德洞里), 서와 남은 삼승면(三升面), 북은 매화(梅花), 사직리(士直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탄부면(炭釜面)의 지역으로서 장수바위가 있으므로 장바우 또는 장암(壯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경상리(景祥里)를 병합하여 장암리(壯岩里)라 하고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경상-리(景祥里)[마을] 장바우 서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소같이 생겨서 중생이라고 부르다가 경상리로 변하였다 함. 장암 2리 마을이다.
- 장-바우(壯岩)[마을] 경상리 동남쪽에 있는 장암리의 중심마을. 마을 뒷산에 장수바위가 있어 장바우 또는 장암이라 부른다. 장암 1리 마을이다.
- 중생-이(甑生)[마을] 경상리의 다른 이름이다. 지형이 가마에 쇠죽을 끓여 소에게 먹이는 형국이라 하여얻은 이름이다.
4. 기타지명
- 가마-둠벙[못] 중생이 남쪽에 있었더 못.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인데 이 못이 쇠죽을 끓이는 가마솥이라 한다. 탄부면의 가마부(釜)는 이 못에 연유한 것이라 하나 1975년 제 1차 경지정리때 메워져 논으로 변하였다.
- 가장-골[골] 중생이 남쪽에 있는 골짜기. 가마둠벙 위가 됨.
- 경상-들[들] 중생이 서쪽 마을앞에 있는 들. ‘중생이들’이라고도 부른다.
- 꽃밭-재[고개] 중생이에서 덕동 2리 석화로 넘어가는 고개.
- 금-샘[우물] 장바우 남쪽 끝 도로변에 있는 샘.
- 넘은-골[골] 중생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매화리구역으로 전에 두집이 살았으나 혀재는 철거되고 밭으로 변했음.
- 대낫-들[들] 중생이 서쪽에 있는 들. 전에 주막이 있었다고 함.
- 대-내(竹田)[내] 장바우 서쪽에 있는 내. 보청천을 말함.
- 도덕-바우[바위] 장바우 북쪽 엉거지재 위에 있는 바위.
- 돌꼬지-고개(石花 )[고개] 장바우에서 덕동리 석화로 넘어가는 고개.
- 물방아-거리[거리] 중생이 북쪽에 있는 거리. 전에 물방아가 있었다고 함.
- 물탕-골[버덩] 중생이 남쪽에 있는 버덩. 옛날에 우물이 있었다 함.
- 불묵간[터] 장바우 동남쪽에 있는 불무간 터
- 새총-말랑[등] 장바우 남쪽에 있는 등성이, 큰 바위가 있고 느티나무 정자가 있음.
- 속-갱변[들] 장바우 남쪽 홍골 건너에 있는 들. 전에는 밤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지금은 경지로 변하였음.
- 쇠-공동묘지[산] 중생이 남쪽에 있는 산. 소가 죽으면 이곳에다 묻었다 함.
- 수피-보[보] 장바우 남쪽 보청천에 있는 보, 대양리 수피들에 물을 댐 “대양보”라고도 부른다.
- 엉거지-재[고개] 장바우 북쪽에 있는 고개. 장사가 나올 지형이라고 해서 임진왜란때 명나라 이여송이 혈을 끊었다고 하며, 옛날에 원님이 이 고개를 넘다가 중간에 호랑이를 만나 엉거주춤하다가 잡혀 먹혔다고 함.
- 장수-바우(壯岩)[바위] 장바우동쪽 경노당 뒷산에 있는 바위, 바위에 발자국 표시가 되어 있고, 깊은 구멍이 뚫려 있음. 옛날 장수가 앞에 있는 금적산에서 이 바위로 뛰어내려왔는데 그때장수의 발자국이 생겼으며, 그 자리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뚫린 구멍이라고 함. 장암이란 지명이 생기게 된 바위다.
- 장암-들[들] 장바위 서남쪽에 있는 들.
- 장암-보(壯岩洑)[보] 중생이 서쪽 대내(보청천)에 있는 보
- 잿-마당[버덩] 중생이 북쪽에 있는 낮은 버덩
- 징기미-들[들] 중생이 서쪽에 있는 들.
- 참나무-들[들] 중생이 서쪽에 있는 들.
- 홍-골[들] 장바우 남쪽에 있는 들. 홈통으로 물을 대었으므로 “홈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한 것임.
5. 문화유적
- 선돌
중생이 마을 앞에 있는 2개의 선돌로 마을앞 선돌은 높이 120cm, 너비 55cm, 두께 35cm이고, 도로 건너편 선돌은 높이 83cm, 너비 32cm, 두께 17cm로 비교적 소형에 속함. 단순한 마을 표지석으로 보임.
- 민속
신목(神木) : 장바우 마을 중앙의 버드나무와 중생이 마을의 버드나무에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풍속이 있음.
6. 산업
쌀
7. 기타
1991년 중생이 마을 입구에 마을 자랑비를 세움.
속리지남(俗離之南)이요 금수지서(錦水之西)라
와우산하(臥牛山下)에 촌명경상(村名景祥)이다.
세세풍년(歲歲豊年)이요 인인낙업(人人樂業)이라
교속부풍(矯俗扶風)하고 상륜숭효(尙倫崇孝)라
태평연월(泰平烟月)은 여구천양(與俱天壤)이라
자랑비 말미에 명(銘)이다.
평각리(坪角里)
1. 위치
면적 2.66㎢, lsrn 67가구 171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북동쪽 8㎞ 지점인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상장리(上長里), 서는 사직리(士直里)와 보은읍(報恩邑), 남은 매화리(梅花里), 북은 보은읍(報恩邑)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사각면(思角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부리같아 평각(坪角)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동(新洞)일부를 병합하여 평각리(坪角里)라 해서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돈-논(敦論)[마을] 동길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평각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땅이 기름지고 수확량이 많아 수입이 높아 “돈논(돈이 되는 논)”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있으나, 옛 문헌에 저답(猪沓)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아 “돋논”이 변한것응로 보임.
- 동길-터[마을] 돈논 서북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지동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다른 마을 사람들이 동길이가 살고 있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함.
- 새-골(新洞)[마을] 동길터 북쪽에 있는 마을. 평각 2리 마을임.
- 새-말[마을] 돈논 남쪽에 있는 마을.
- 웃-마실[마을] 돈논 동쪽에 있는 마을.
- 평각(坪角)[마을] 돈논 남쪽에 있는 “새말”의 다른 이름으로 지형이 소가 들에 누워 있는 것처럼 생겼는데 마을이 앉은 자리가 누운 소의 뿔에 해당된다고 함.
4. 기타지명
- 가지나무-골[골] 새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강당[버덩] 돈논 동북쪽에 있는 버덩, 높고 평평하다고 함. 마을이 있었으나 모두 이주하였음.
- 거치실-재(荒谷峴)[고개] 돈논에서 외속리면 황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 고리-골[골] 돈논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는 좁으나 안으로 들어가며 넓다고 함.
- 곱새-골[골] 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관-논[들] 돈논 남쪽에 있는 들. 매화리 구역임.
- 금괭기[골] 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보은읍 삼년산성까지 이어지는 골짜기로 길고 크다고 함. 옛날 고려장터였다고 함.
- 금-성(金城)[산] 돈논 동쪽에 있는 산.
- 내미-재(羅彌峴)[고개] 돈논에서 상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 논-골[골] 돈논 동쪽에 있는 골짜기. 논이 많다고 함.
- 대듬-골[골] 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대목-고개[고개] 평각에서 외속리면 구인리로 넘어가는 고개.
- 돈논-못[못] 돈논 동쪽에 있는 못. 폐지되고 일부 논으로 변했음.
- 모심기-들[들] 웃마실 동남쪽에 있는 들.
- 방구-모랭이[모롱이] 돈논 동쪽에 있는 모롱이. 길가에 큰 바위가 있음
- 배실-골[골] 돈논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버무기[골] 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삼각-골[골] 돈논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마을이 있었다고 함.
- 쌍바지-골[골] 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새골-재[고개] 새골에서 보은읍 어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 소막-골[골] 돈논 북쪽에 있는 골짜기. 소나무로 소구유를 만드는 곳이였다고 함.
- 수안-구렁[들] 새골 남쪽에 있는 들.
- 안-터[터] 돈논 북쪽에 있는 터. 인가가 5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없음. 강당안이 됨.
- 앞-들[들] 새골 남쪽에 있는 들.
- 집너머-구렁[들] 돈논 동남쪽에 있는 들.
- 주막-거리(두집메)[터] 새골 남쪽 장고개 아래 주막이 있었던 자리.
- 한사리-골[골] 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금괭기와 연결됨.
5. 문화유적
- 김도명효자문(金道明孝子門)
웃마실에 있는 경주인(慶州人) 김도명(金道明)과 그의 아들 한붕(漢鵬) 두 부자의 효행을 기리는 정문. 도명은 1819년(순조 19) 한붕은 1835년(순조 35)에 각각 명정되었다.
- 진주목사 김홍(晋州牧使 金泓)의 묘와 신도비
경주인(慶州人) 김홍(金泓)의 묘소와 신도비로 웃마실에 있다.
- 민속
산제당 : 돈논 뒷산과 새골 뒷산에 있는 산제당으로 정월 2일 거행하였으나, 현재 중단되었음. 돈논은 당집으로 새골은 돌탑으로 되어 있음.
6. 집성
- 경주김씨(慶州金氏)
상촌(桑村) 후손들이 집성으로 살았으나 현재는 10여호만 거주하고 있음.
7. 산업
쌀
하장리(下長里)
1. 위치
면적 2.28㎢, 인구 152가구 430명(1999년말)
면 소재지 마을로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임한리(林閑里)와 구암리(九岩里), 서는 벽지리(碧池里), 남은 대양리(大陽里), 북은 상장리(上長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탄부면(炭釜面)의 지역으로서 긴매(長山)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진미 또는 하장산(下長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장리(下長里)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닭-모랭이(唐隅里)[마을] 진미 동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함. 하장 2리가 됨.
- 진-미(長山, 下長山, 下唐, 긴장대)[마을] 하장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뒤쪽으로 긴 산이 둘러있고 땅이 황토질이라 질기다고 하여 긴장대라고도 함, “긴메"의 충청도 방언인 ”진메“가 변하여 ”진미“가 되었음.
4. 기타지명
- 감재-들(감저티)[들] 닭모랭이 남쪽에 있는 들. 벼농사가 잘 되지 않아 감자를 심었더니 풍년이 되어 들 전체에 감자를 심었다고 함.
- 도장-골[골] 진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졸밭골의 첫 번째 골짜기로 골안이 안방처럼 아늑하다 함.
- 동오리-산[산] 진미 동남쪽에 있는 산, 높이 153m 원앙들 복판에 있는 둥근산.
- 뒤-께[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오래전부터 깨의 생산지였다 함.
- 뒷-골[골] 진미 뒤쪽에 있는 골짜기.
- 비선-골[골] 가평이씨의 덕을 기리기 위한 비가 서 있는 골짜기.
- 샘-너머[들] 청계샘 서쪽 너머에 있는 들.
- 서당-골[골] 진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이 있었음.
- 숲-밖(쑤밧)[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전에 버드나무 숲이 있었는데, 경지정리시 없어졌음, 숲의 바깥쪽이 됨.
- 숲-안(쑤안)[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버드나무 숲 안쪽이 됨.
- 윗-들[들] 진미 남쪽에 있는 들.
- 웃-골[골] 진미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 원앙-들(元央坪)[들] 진미 남쪽에 있는 들.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잘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함.
- 이문이-골[골] 진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잔-허리(자노리)[산] 진미 동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잘록하게 되어 있음.
- 전문-거리[거리] 진미동쪽 월성명정의 정문이 있는 거리.
- 줄밭-골[골] 진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 모양이 긴 밭모양이라고 함.
- 청계-샘[샘] 진미 서쪽에 있는 샘. 물이 맑고 수원이 좋음.
- 청양-골[골] 지형이 청룡형이라 함.
- 친한-바위[바위] 진미 서쪽에 있는 바위. 이 바위에 언제나 모여앉아 친하게 노는 사람이 많다고 함.
- 하당-저수지(下唐貯水池)[못] 진미 북쪽에 있는 못.
- 홀깨미-동산[산] 하장 북쪽에 있는 산. 산제당이 있음.
5. 문화유적
- 익재영당(益齋影堂)
진미미을에 있는 익재(益齋) 이제현(李劑賢)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이다. 1504년(연산군 10) 후손인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이 폐비 윤씨의복위를 반대하다가 이곳으로 부처(付處)되었을 때 건립하였다. 건물은 삼문까지 3동으로 전면에 “염수재(念修齋)”라는 재실이 있고 그 뒤에 영당이 있는데, 그 사이에 내삼문을 설치하고 담장을 둘렀다.
영당은 전면 2칸, 옆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익공을 달았으며, 그 안에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영정은 초상화로 정본이 아니라 묘사한 부본인데, 길이 165cm, 너비 96cm로 호상(胡床)에 좌측면관좌상(左側面觀坐像)이다. 정본은 국보 제 110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봉안한 영정은 충청북도지방 유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도난을 당하였으나 이듬해 서울에서 발견되었고, 보관의 어려움이 있어 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본을 봉안하고 있다.
중문은 소슬삼문이며 재실은 목조 2층으로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집인데 1층 중앙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念修齋”란 현판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글씨라 하며, 내부에는 “익재선생 영정각 증수기”가 걸려있다.
- 월성명정(月城名旌)
진미 정문거리에 있는 효자 3인과 열녀 2인의 정문이다. 정면 6칸 옆면 1칸, 맞배지붕의 건물로 효자인 이창경(李昌慶), 원경(元慶), 명경(鳴慶) 삼형제는 강도가 집에 쳐들어 와서 아버지를 해치려 할 때 어린 나이에도 용감하게 강도를 막고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였으며, 연안김씨(延安金氏)와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남편에 대한 열행으로 삼형제는 1666년(현종 7)에 연안김씨는 1747년(영조 23), 창녕성씨는 1794(정조 18)에 명정되어 현판하였고, 맨 우측에는 후손 이덕우(李德雨)가 쓴 “문강공눌헌이선생절충기적비(文剛公訥軒李先生絶忠記蹟碑)”가 세워져 있다.
- 이명백충신각(李命百忠臣閣)
닭모랭이 보덕중학교 앞에 있는 충신정문이다. 가평인(加平人) 이명백(李命百)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마로면 적암리에서 왜군의 진로를 막고 수차례 싸우다 순절하였다. 1812년(순조 12)에 명정되어 처음 구암리에 정문을 세웠다가 1970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1칸, 옆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 정암구연홍선생교육송덕비
보덕중학교 설립인가의 공적을 기린 비로 1983년 중학교 정문 앞에 건립한 비다.
- 민속
산제 : 홀깨미동산에 있는 당집에서 매년 정월 초이튿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제를 올리고 있다.
6. 산업
쌀
7. 기타
진미 입구 도로가에 1988년 애향비(愛鄕碑)를 세웠고, 그 옆에 다시 1998년 마을자랑비를 건립하였다 애향비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인심좋고 예의바른 우리 마을 눈 앞에는 넓은 들, 기름진 땅, 풍년을 약속하네 누구나 마음씨 곱고, 살기좋은 우리마을 진미마을 너와 나는 진미를 떠날지라도 못잊을 우리마을 진미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