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속리면
- 갈목리
- 구병리
- 대목리
- 만수리
- 백현리
- 북암리
- 사내리
- 삼가리
- 상판리
- 중판리
- 하판리
- 외속리면
- 구인리
- 봉비리
- 불목리
- 서원리
- 오창리
- 장내리
- 장재리
- 하개리
- 황곡리
내속리면(內俗離面)
1. 위치
면적 92.31㎢, 인구 1,070가구 3,119명(1999년말). 군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경북) 상주시(尙州市) 화북면(화북면), 서는 보은읍(報恩邑), 남은 외속리면(外俗離面), 마로면(馬老面), 북은 산외면(山外面)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의 지역으로서 속리산(俗離山) 밑이 되므로 속리면(俗離面)이라 하여 백현(佰峴), 북암(北岩), 하판(下版), 중판(中板), 상판(上板), 사내(舍乃), 갈목(葛目), 대목(大目), 묘막(墓幕), 삼가(三街), 서원(書院), 구병(九屛), 불목(佛目), 봉비(鳳飛), 하개(下開), 장내(帳內), 황곡(荒谷), 장재(壯才), 안돌(岸乭), 사량(士良), 애평(艾坪), 사창(士倉), 오룡(五龍), 오봉(五峰), 오심(五心), 신기(新基), 서평(鋤坪)의 2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암, 하판, 중판, 상판, 사내, 갈목, 대목, 묘막, 삼가, 서원, 구병, 불목, 봉비, 하개, 장내, 황곡, 장재, 오창의 19개 리로 폐합하고 서원리를 면소재지로 하였다가 1947년 2월 7일부터 충청북도령 제36호 행정구역 분구에 의하여 속리면을 갈라서 안쪽이 되므로 내속리면이라 하여 갈목, 구병, 대목, 묘막, 백현, 북암, 사내, 삼가, 상판, 중판, 하판의 11개리를 관할하다가 1987년 1월 1일 군조례에 의거 묘막리를 만수리(萬壽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면소재지는 상판리이다.
3. 자연
북부와 동부면계에 묘봉(묘봉:874m), 관음봉(觀音峰:983m), 천황봉(天皇峰:1,058m), 형제봉(兄弟峰:803m) 등의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서부는 태봉(胎峰:491m), 수철령(水鐵嶺:536m), 구룡티(九龍峙:508m), 새목이재(536m) 말티재, 남부는 희엄이재 구병산(구병산:876m) 등으로 둘러싸여 산지지대를 이루고 속리천(俗離川)의 지류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며 유역에 소규모의 충적지를 형성하고 있다.
4. 산업
밭 344.3ha, 논 153.9ha, 임야8,339ha로 밭농사 위주로 고추, 감자, 채소, 담배 등의 재배가 성하고 고산성 식물인 고사리, 송이버섯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면의 대부분이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광업이 크게 발달하여 사내리에는 속리산 문전 관광취락이 발달하여 각종 상점과 서비스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5. 교통・문화
국도 37호선이 면의 남부에서 서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국도와 연결되어 법주사까지 관광도로가 나 있고 지방도 505호선이 남부를 통과하고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법주사가 있으며 사찰내에 쌍싸자석등, 팔상전, 석련지, 사천왕석등 마예여래의상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또한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서 명승사적지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 사내리에 보은속리산의 망개나무와 산판리에 속리의 정이품송이 있다.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1개교와 분교 2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갈목리(葛目里)
1. 위치
면적 5㎢, 22가구 51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서남쪽 5㎞ 지점인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삼가리(三街里), 서와 남은 외속리면(外俗離面), 북은 상판리(上板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속리면(俗離面) 지역으로서 갈목(葛目)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티(馬峙), 상갈목(上葛目), 하갈목(下葛目)을 합하여 갈목리(葛目里)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갈-목(葛目)[마을] 전에 마을 주위에 칡덩굴이 많아 갈목이라 하였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길이 갈라지는 목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갈목리’라 하였음. 보은 8항(팔항)의 하나라고 함.
- 말-티(馬峙)[마을] 말티고개 아래에 있었던 마을. 세조가 속리산에 올 때 연을 타고오다 말로 갈아타고 온 마을. 현재는 마을이 없어졌음.
- 아래-갈목이(下葛目)[마을]갈목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웃-갈목이(上葛目)[마을]아래갈목이 남쪽에 있는 마을. 위쪽이 됨.
4. 기타지명
- 갈목-재[고개] 갈목리 남쪽에 있는 고개. 갈목에서 삼가저수지로 넘어가는 고개.
- 다섯작-골[골] 갈목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 말티마을 뒤에 있음.
- 말티-고개(馬峙,말티재, 박석재)[고개] 말티에서 외속리면 장재리로 넘어가는 고개. 세조가 속리산에 올 때 연에서 내려 말을 타고 넘어 왔다고 하여 불리워졌다고 함. ‘말’은 ‘높다’의 고어로 ‘말티고개’는 ‘높은고개’를 뜻함.
- 박석-티(薄石峙, 박석재)[고개] 말티고개의 다른 이름.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올 때 고개길에 넓고 얇게 든 돌을 깔았으므로 ‘박석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방구바우-골[골] 웃갈목이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배나무-골[골] 아래갈목이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불당-골[골] 웃갈목이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불당이 있었다 함.
- 불목이-고개[고개] 웃갈목이에서 삼가리 불목이로 넘어가는 고개.
- 산재당-골[골] 웃갈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산제당이 있었음.
- 삼가리-고개[고개] 웃갈목에서 삼가리 작은고개말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 확장 포장되어 현재는 ‘갈목재’라 고쳐 부르고 있음.
- 소-고개[골] 웃갈목이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안에 능선이 있음.
- 솟대-배기[골] 아래 갈목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봉화를 올리던 솟대가 있었던 자리라고 함.
- 웅-골[골] 웃갈목이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갈목리에서 가장 큼.
- 작은-회너미골[골] 웃갈목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치마-바우[바위] 웃갈목이 남쪽에 있는 바위. 치마를 두른 것처럼 생겼다 함.
- 치마바우-골[골] 치마바위가 있는 골짜기.
- 큰-회너미골[골] 아래갈목이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회너미고개 길목으로 갈목삼거리와 된내기골 사이에 있음.
- 회너미-재[回越峙. 回踰峙 희엄이재)[고개] 갈목리에서 외속리면 서원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속리절 중과 구병절 중이 이 고개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허행하고 되돌아 갔다하여 생긴 이름이라 함.
5. 산업
구병리(九屛里)
1. 위치
면적 2.86㎢, 인구 23가구 67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3㎞ 지점으로 면의 동남쪽 끝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慶北) 상주시(尙州市) 화남면(花南面), 서는 외속리면(外俗離面), 남은 마로면(馬老面), 북은 삼가리(三街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윗멍어목이, 느진목이, 된목이를 합하여 구병산(九屛山:876m)밑이 되므로 구병리(九屛里)라 하였으며 1974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구렁-말[말] 윗멍어목이 북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 느진-목이[마을] 윗멍어목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 산밑에서 쳐서 떨어져 있음.
- 돌-목이(石項 된목이)[마을] 느진목이 남쪽에 있는 마을. 산밑에 바짝 붙어 있어 된목이라고도 부름. 돌이 많다 함.
- 윗-멍어목이(上駕項)[마을] 구병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 함. 석항과 합하여 보은 8항(八項)의 하나라 함.
4. 기타지명
- 구병대(九屛臺)[바위] 구병리 남쪽 구병산에 있는 바위.
- 날근터-골[골] 돌목이 남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활처럼 굽어 있는 골짜기.
- 노디밭-골[골] 윗멍어목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노루-골[골] 윗멍어목이 북서쪽 마을 입구에 있는 골짜기.
- 노새-골[골] 윗멍어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 뒤로 구병산이 이어짐. 옛날에 이 골에 노새를 많이 길렀다 함.
- 더덕-골[골] 윗멍어목이 동쪽 노새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 상투바위로 이어짐. 더덕이 많이 자란다고 함.
- 돌목-구텅이골[골] 돌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돌목이와 날근터골 사이에 있음.
- 뒷-골[골] 윗멍어목이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위에 쌀개바위가 있음.
- 사미-골[골] 더덕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상투-바우[바위] 윗멍어목이 남쪽 구병산 신선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바위. 상투처럼 뾰족하게 생겼음.
- 쌀개-바우[바위] 윗멍어목이 서남쪽 구병산에 있는 바위 방아 쌀개처럼 생겼음
- 신선-골[골] 윗멍어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구병산 신선대로 올라가는 길목임.
- 월-봉(月峯 : 449m)[산] 윗멍어목이 남쪽 마을 뒤에 있는 산. 봉우리가 서반월(서반월)의 형태를 하고 있어 묘자리가 없다고 함.
- 작은노루-골[골] 윗멍어목이 서북쪽 노루골에 속한 골짜기.
- 장승-배기[터] 윗멍어목이 북쪽 마을 입구에 장승이 있었던 곳.
- 제피-골[골] 윗멍어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5. 문화유적
- 민속
산제 : 매년 정월과 칠월에 택일하여 마을 뒤산에 있는 산제당와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배기에서 거행되고 있음.
6. 산업
- 옥수수, 엇갈이무우, 고추
- 기업체 현황
업체명 |
소재지 |
생산품목 |
종업원수 |
장수마을 식품 |
내속리면 구병리 417 |
대추약 고추장 |
4 |
7. 기타
5회에 걸쳐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되었으며 197년 마을 자랑비를 세웠다. 장수(장수)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소가 누은듯한 우복동으로 비결이 있는 피난처로 알려져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와 살던 마을이다.
대목리(大目里)
1. 위치
면적 7.16㎢, 인구 12가구 34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2㎞ 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만수리(萬壽里), 서는 상판리(上板里), 남은 삼가리(三街里), 북은 사내리(舍乃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큰 목 밑이 되므로 대목골 또는 대목(大木), 대목동(大木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웃대목(上大木)과 아래대목(下大目)을 병합하여 대목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대목리(大木里, 大睦里 대목골)[마을] 원래는 봄철에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어서 임경업(林慶業)장군이 무예를 닦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다가 도화동(桃花洞)이라 불러 처음에는 ‘도화동’이라 불리워 왔다. 일설에는 지형이 복숭아 같아 ‘도화동’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뒤에 마을 사람들이 크게 화목하게 산다하여 대목동(大睦洞)이라고 바꾸어 불리워오다가 한일합방후 이 마을에 큰 나무가 있어 대목리(大木里)로 바꾸었다고 한다.
- 아래-대목골(下大目)[마을] 대목리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웃-대목골(上大木)[마을] 대목리의 위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가마-골[골] 아래대목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가마를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함.
- 감투-봉[산] 모양이 감투처럼 생겼다고 함.
- 고욤나무-골[골] 웃대목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고욤나무가 많았다 함.
- 고사리밭-골[골] 아래대목골 동쪽에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 고사리가 많이 자라고 있다고 함.
- 너-바우[바위] 웃대목골 서북쪽에 있는 바위. 바위가 넓다하여 ‘너븐바우’라고도 부른다.
- 넘바우-골[골] 넘바위가 있는 골짜기. 고욤나무골 위에 있음.
- 노장-바우[바위] 천황봉 인자바위 위에 있는 바우. 코바위 옆에 있음.
- 동가-추리[고개] 웃대목골 서북쪽으로 복천암 앞 돼지바위골로 넘어가는 고개.
- 떡갈목-이[고개] 대목리에서 경북 상주시 화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떡갈나무가 많았다고 함.
- 마당-바우[바위] 천황봉 안쪽으로 인자바위 밑에 있는 바위. 마당처럼 넓고 평평하다고 함.
- 마당바우-골[골] 웃대목골 동북쪽 인자바위로 뻗은 골짜기.
- 바우-골[골] 아래 대목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바위 두 개가 있었다고 하나 도로확장으로 없어졌음. 위쪽골짜기가 ‘작은바우골’ 아래골짜기가 ‘큰바우골’이다.
- 밤나무-골[골] 웃대목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밤나무가 많았다 함.
- 배암-날[등성이] 천황봉 및 인자 바위 왼쪽에 있는 산줄기. 뱀처럼 길게 내려 왔음.
- 버섯밭-골[골] 웃대목골 동북쪽 천황봉 아래의 골짜기. 버섯이 많이 자라고 있다 함.
- 보석박-골[골] 천황봉 밑 인자바위 왼편에 있는 골짜기. 쟁기의 보습처럼 생겼다 함. ‘보습바위골’이 변하여 ‘보석박골’이 된듯하다.
- 빙이대-골[골] 아래대목골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산박-골(山幕)[골] 웃대목골 동쪽 뱀날 밑에 있는 골짜기.
- 산장-골[골] 웃대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산재당-골[골] 아래대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쌀개목-골[골] 웃대목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밤나무골 앞에 있음.
- 새목-골[골] 아래대목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가 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함.
- 새목-이[고개] 아래 대목골에서 상판리 정이품송으로 넘어가는 고개.
- 새안-골[골] 웃대목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샘-골[골] 웃대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소나무-거리(松亭)[거리] 아래 대목골 입구에 있는 거리. 전에는 소나무가 4그루 있었으나 지금은 3그루밖에 없음.
- 시영-골[골] 웃대목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동가추리로 가는 길목임.
- 아가리없는-골[골] 아래대목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 아래가 바위로 막혀 있음.
- 아우동[골] 작은 소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함.
- 앞산-골[골] 아래대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여박-골[골] 아래대목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여우가 많았다고 하여 여씨의 밭이 있었다고도 함.
- 욱박-골[골] 아래대목골 동쪽 장구목이 아래에 있는 골짜기. 옻나무가 많았다고 함.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는 ‘큰욱박골’ 중간에 동쪽으로 뻗은 것을 ‘작은욱박골’이라 부르며 ‘웃밭골’이라고도 부름
- 웅-골[골] 아래대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까지 이어짐.
- 인자-바우(人子岩)[바위] 웃대목골 동북쪽 소천황봉 밑 절벽에 있는 바위. 사방 50m정도의 큰 바위에 한변의 길이 35~30m, 패인 길이 3m정도의 人변을 따라 암반의 색깔이 흰색 무늬를 띄고 있다. 또 人변 밑 ks 가운데에 직경 2m정도의 둥근 공모양의 새까만 원이 그려졌음.
- 작은-대목골[골] 웃대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장구목-골[골] 아래대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모양이 장구목 같이 생겼다 함.
- 최첨지터-골[골] 웃대목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떡갈목이로 이어짐. 옛날에 최첨지가 살았다고 함.
- 코-바우[바위] 천황봉 인자바위 위에 있는 바위. 사람의 코처럼 생겼음.
- 화-산(火山)[산] 산의 모양이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되어 있어 화산이라 하였으며 이산으로 인해 대목리에 산불이 자주 난다 하여 산꼭대기에 간수병을 묻었다 함.
5. 문화유적
- 민속
산 제 : 매년 정월 6일과 칠월 6일날 웃대목골 마을 뒷산에 있는 산신당에서 사제를 거행하고 있음.
6. 산업
만수리(萬壽里)
1. 위치
면적 11.3㎢, 인구 28가구 92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2㎞ 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과 북은 경북(慶北) 상주시(尙州市) 화북면(化北面), 서는 대목리(大木里), 남은 삼가리(三街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풍천임씨(豊川任氏) 문중의 묘막이 있다하여 묘막(墓幕)이라 하였는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군조례에 의해 만수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3. 자연마을
- 냉-골[마을] 만수동 남쪽에 있었던 마을 1976년 화전정리때 모두 철거 되었다.
- 만수-동(萬樹洞)[마을] 만수동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임자가 있었는데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뜬물이 10리나 뻗쳐 흘렀다고 함.
- 만수-동(萬壽洞)[마을] 만수리의 으뜸되는 마을. 옛날에는 만세암(萬世庵)이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조선 현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풍천인(豊川人) 임의백(任義伯)의 묘가 뒷산에 생기고 일대의 토지가 모두문중의 소유가 되었으며 묘막(墓幕)을 짓고 사람을 구하여 관리하게 하므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묘막(墓幕)이라 부르던 것을 1987년 만수동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음.
- 묵밭-추리[마을] 만수동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1976년 화정 정리 때 모두 철거되었다.
- 산-막(山幕)[마을] 만수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 피앗-재[마을] 만수동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1976년 화전 정리 때 모두 철거되었다.
4. 기타지명
- 감투-봉[산] 묵밭추리 북쪽에 있는 산. 감투처럼 생겼음.
- 거북-바우[바위] 냉골 안쪽에 있는 바위. 둥근 바위 위에 작은 것이 삐죽 내민 것이 멀리서 보면 거북이처럼 보인다고 함.
- 깊은-웅댕이골[골] 묵밭추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곰바우-골[골] 냉골 입구왼쪽으로 첫머리에 있는 골짜기. 곰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함.
- 나무박-골[골] 만수동 서북쪽 천황봉골에 속한 골짜기.
- 남산-골[골] 만수동 동북쪽 약산골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 독-바우[바위] 묵밭추리 남쪽에 있는 바위. 오뚝하게 서 있는 모양이 밑에서 올려다 보면 곧 넘어갈 것 같으나 올라가서 밀어보면 끄덕도 않는다 함.
- 독산제당-골[골] 만수리 입구 삼가3교다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매-바우[바위] 만수동 남쪽 산에 있는 바위. 매처럼 보인다 함.
- 매바우-골[골] 만수동 남쪽 매바위가 있는 골짜기.
- 먹굴-골[골] 묵밭추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로 가는 길목이 됨.
- 묵밭-추리골[골] 만수 서남쪽 묘막1교와 묘막2교 사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바깥-나무박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 바른쪽 두 번째 골짜기.
- 바른-골[골] 천황봉골에 딸린 왼쪽 마지막 골짜기.
- 밤나무골-골[골] 만수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천황봉골의 왼쪽 첫 번째 골짜기임.
- 산재당-골[골] 산막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새먹-골[골] 묵밭추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주차장 동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임.
- 성문-바우[바위] 산막 북쪽 산에 있는 바위. 마치 성문처럼 보임.
- 송이밭-골[골] 큰묵밭추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송이버섯이 많이 나온다함.
- 안-나무박골[골] 바깥나무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애마무-골[골] 만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약시-골[골] 만수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용수시미-골[골] 만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벽 중간에 굴이 있는데 용이 하늘로 올라갈때이리저리 부딪힌 자국이 있다고 함.
- 작은-고사리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 작은-냉골[골] 묘막2교 건너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작은-묵밭추리들[들] 묘막1교 남쪽에 있는 들.
- 작은-산지텃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 장구목-골[골] 만수리에서 대목리로 넘어가는 골짜기. 장구목처럼 잘록하게 생겼다함.
- 절-골[골] 냉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절이 있었다 함.
- 주산-날등[등] 만수동 북쪽 천황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 충청감사 임의백의 묘가 있음.
- 진등뱅이-골[골] 만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6.25후 피난민들이 들어와 화전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었으나 화전정리때 모두 이전하였음. 골이 길으며 둥벙처럼 깊고 넓다함.
- 진-밭[밭] 만수리 입구 독바위골에서 다리 건너에 있는 밭. 고랑이 길어서 밭머리가 안보인다고 함. 전에 부부가 밭고랑 양쪽에서 스슥(조) 밭을 매들어오고 있었는데 하도 멀리 떨어져있어 아내가 도망가는 줄도 몰랐다고 함.
- 집텃-골[골] 만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짚은-둠벙[둠벙] 냉골 입구 독바위 앞에 있는 둠벙.
- 천황봉-골[골] 만수동에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 큰-고사리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작은 고사리골 위에 있음.
- 큰-냉골[골] 묘막3교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큰-묵밭추리들[들] 묘막1교 옆에 있는 들.
- 큰-산지텃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작은 산지텃골 아래에 있음.
- 피앗-재[고개] 만수리에서 경북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로 넘어가는 고개.
- 피앗재-골[골] 만수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피앗재로 가는 길목임.
- 할인-굴[굴] 산막북쪽 산중간에 있는 굴.
- 형제-봉(兄弟峰:803m)[산] 만수동 동쪽에 있는 산. 봉우리 2개가 마주 서 있다.
5. 문화유적
- 만세암지(萬世庵址)
만수리 만수동(萬樹洞)마을 25-2번지에 있는 절터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1860년대에 폐찰되었는데 사찰의 규모가 대단하여 쌀 씻는 물이 10리나 내려 갔다고 하며 승려가 수천명이 있었다 한다. 풍천임씨(豊川任氏)선대의 묘를 이 사찰 뒤에 모신 후 폐찰하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발간 조선고적보물조사자료에 의하면 ‘만수암지(萬壽庵址)’라 칭하고 마을 전체가 사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 임의백묘(任義伯墓)
주산날등에 있는 충청도관찰사 풍천인(豊川人) 임의백(任義伯)의 묘소로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 임좌묘(任座墓)
조선현종때 상의원정(尙依院正) 풍천인 임좌의 묘소로 군자감정 임성주(任聖周)의 묘가 있다.
- 민속
산 제 : 매년 정월과 동지달에 마을 앞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거행하고 있다.
6. 산업
7. 기타
천황봉 3파수(三派水)의 하나인 금강지류인 삼가천의 발원지로서 마을 중심부를 이리 저리 곡류하면서 관통하고 있으며 3㎞에 달하는 맑은 물은 ‘만수계곡’이라 불리우며 여름철 많은 탐승객이 왕래하고 있다. 1993년 마을 회관 앞에 마을 자랑비를 세움.
백현리(栢峴里)
1. 위치
면적 3.15㎢, 인구 25가구 64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2㎞ 지점으로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북암리(北岩里), 서와 북은 산외면(山外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성재 밑이 되므로 잣고개 또는 백현(栢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외면(山外面)의 장갑리(長甲里) 일부를 병합하여 백현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잣-고개(栢峴)[마을]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살던 효자로 이름 높던 나중경(羅重慶)이 앞산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커서 나무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게 자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잣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4. 기타지명
- 국사-봉(國師峰:535m)[산] 잣고개 서남쪽에 있는 산. 보은읍 내속리면 산외면의 경계가 됨. 천지개벽때 국수가닥 만큼만 남고 모두 물에 묻혔다고 ‘국수봉’이라고 부름.
- 동적-골[골] 잣고개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방두골 안에 있음.
- 딱밭-골[골] 잣고개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문앞-들[들] 잣고개 마을 앞에 있는 들.
- 문앞-보[보] 잣고개 남쪽 북암리 북쪽 속리천에 설치된 보. 문앞들 관개에 이용됨.
- 방두-골[골] 잣고개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적을 방지하기 위한 골짜기라고 ‘방적골’이라고도 부름.
- 불당-터[터] 잣고개 동쪽 방두골에 있는 절터.
- 사랭이-골[골] 잣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새-들(新坪)[들] 잣고개 남쪽 문앞보 앞에 있는 들. 문앞들 보다 뒤에 만들어졌다 함.
- 성-고개(성재)[고개] 잣고개에서 산외면 백서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정하였다는 성이 있다.
- 성-너머[들] 잣고개 북쪽 성고개 너머에 있는 들. ‘개들’이라고도 한다.
- 성통바우-골[골] 수무니골 안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소대-바우[바위] 잣고개 동쪽 속리천가에 있는 바위. 칼바우 위에 있음.
- 속개울-골[골] 성고개 넘어 속리천 건너에 있는 골짜기.
- 수무니-골(水門谷)[골] 잣고개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길어 5마장 정도나 되어 6.25때는 이 골에서 피난을 하였다고 함. 골짜기 막판에 한때 사람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함.
- 아가리 맥힌-골[골] 방두골 안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로 골 입구가 막혀 있다고 함.
- 안-산[산] 잣고개 앞에 있는 산.
- 안장-바우[바위] 잣고개 동쪽 속리천가에 있던 바위. 말안장처럼 생겼음. 1988년 폭파되어 없어졌음.
- 음달-말[터] 잣고개 동쪽 냇물 건너 음달쪽에 있는 마을터. 전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밭으로 변하였음.
- 이미니-골[골] 수무니골 입구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이미니라는 사람의 묵묘가 있다고 함.
- 작은-골[골] 잣고개 남서쪽 국사봉에 있는 골짜기.
- 잣-고개(栢峴)[고개] 잣고개 서북쪽에 있는 고개. 산외면 백석2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마루에 잣나무가 있었다고 함.
- 주막-거리[거리] 잣고개 앞 활고개 밑 도로 가의 거리 전에 주막이 있었다고 함.
- 주막-뒷산[산] 잣고개 동남쪽 도로 가에 있는 산.
- 진-골[골] 방두골 안에 있는 골짜기. 골이 길다고 함.
- 진천샌님모이-골[골] 수무니골 안에 있는 골짜기.
- 칼-바우[바위] 잣고개 동쪽 속리천가에 있는 바위. 칼처럼 길다고 함.
- 큰-골[골] 잣고개 남서쪽 국사봉에 있는 골짜기.
- 큰소나무-버덩[버덩] 수무니골 안에 있는 버덩. 합천군수 묘가 있음.
- 태봉-산(胎峯山:491m)[산] 잣고개 서북쪽에 있는 산. 왕의 태를 묻었다고 전해오고 있음
- 퍼징이-안골[골] 수무니골 안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안이 입구보다 넓게 퍼졌다고 함.
- 합천군수-모이[묘] 큰소나무골 펀던에 있는 묘
- 허지분-골[골] 잣고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형제-골(兄弟谷)[골] 잣고개 남쪽 속리천 가에 있는 골짜기. 형제가 피난하였다 함.
- 홍두깨-날[산] 잣고개 남쪽 국사봉에서 내려온 산등성이.
- 활-고개[고개] 잣고개에서 북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5. 문화유적
- 나중경 효자각(羅重慶 孝子閣)
효자 안정인(安定人) 나중경의 효성을 기리는 정문으로 1854년(철종 5)에 명정되었다. 정문은 마을 앞 37호 국도변에 있으며 정언(正言) 권세형(權世衡)이 짓고 진사(進士)임성주(任聖周)가 쓴 행장(行狀)이 편액 되어있다.
- 어필각(御筆閣)
효자 나중경에게 1689년(숙종 15)에 준천첨(濬川첨)을 왕이 하사하였던 것을 1868년에 건물을 짓고 편액 하였다. 이제 준천첨 판각은 도난 당하여 없어지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쓴 제액(題額)은 남아 있으나 몹시 퇴락 되었다.
- 백현산성(栢峴山城)
성고개(324m)에 있는 둘레 242m의 돌로 쌓은 성으로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형체는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 마을이 속리산에서 청주로 통하는 길목이 되므로 청주로 향하거나 청주에서 오는 것을 차단할 수 있어 규모는 작으나 고개 위에 자리잡고 있어 그 기능은 자못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 성 이외에 마을 뒷산인 태봉(태봉:491m)에도 성이 있어 형제성이라 부르고 있다.
- 월파정지(月波亭址)
나상덕(羅相德)이 선조인 효자 중경(重輕)의 유지를 계승하고 효행을 기리고자 1944년 건립하였으나 1985년 무너지고 말았다. 정자 앞에 있던 연지(蓮池)는 반 이상 매몰된 상태다.
6. 집성
안정 나씨(安定 羅氏) 집성촌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6호만 거주하고 있음.
7. 산업
8. 기타
마을 앞 속리천 냇가 정자나무 아래에 1992년 마을 자랑비를 세움
북암리(北岩里)
1. 위치
면적 9.61㎢, 인구 72가구 210명(1999년말) 면소재지로부터 서북쪽 10㎞ 지점인 면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사내리(舍乃里), 서는 보은읍(報恩邑), 남은 하판리(下板里), 북은 백현리(栢峴里)와 산외면(山外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북바우 또는 종암(種岩), 북암(北岩)이라 하였는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부내-실[마을] 세강터 동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부자가 천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함. 북암2리의 으뜸되는 마을임.
- 부수-골(富壽洞)[마을] 농바우 동북쪽에 있는 마을
- 북-바우(種岩)[마을] 북암의 또다른 이름. 북처럼 생겼다함
- 세강-터[마을] 부내실 서쪽에 있는 마을. 앞에 세 갈래로 흐르는 내가 있음. 북암1리의 중심되는 마을.
- 소리-목[마을] 부수골 남쪽에 있는 마을 소리목 고개 아래에 있음.
- 터-골(水繖洞 무수목)[마을] 세강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 수명이 무수하게 길다 하여 ‘무수목’이라고도 함.
4. 기타지명
- 골-안[골] 부내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깊다고 함.
- 굴-바우[바위] 세강터 동쪽에 있는 바위. 굴이 있으며 떡갈목골에 있음.
- 논-골[골] 부수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논이 많음
- 농-바우[바위] 부내실 북쪽에 있었던 바위 모양이 농처럼 생겼다고 함. 도로확장공사로 대부분 없어졌음.
- 누룩-바우[바위] 세강터 북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누룩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함.
- 늘메-기[골] 부수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경북 용화로 가는 길목임.
- 덧논-들[들] 부수골 마을 중간에 있는 들.
- 독밭-골[골] 부수골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바위 2개가 양쪽으로 있음.
- 떡갈-목[골] 농바우 동쪽에 있는 골짜기. 떡갈나무만 많아 ‘떡갈개비’라 하던 것이 변한 것임. 굴바위가 있음.
- 매-바우[바위] 부수골 동쪽에 있는 바위. 전에 이 바위에 매가 새끼를 쳤다 함.
- 모른고지-골[골] 세강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산봉우리가 모가 나있음.
- 무수목-고개(水鐵領)[고개] 무수목에서 보은읍 종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무쇠목’이 변한것임.
- 부수-골[골] 부수골 마을이 있는 골짜기.
- 부채-바우[바위] 소리목 동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부채같다 함.
- 부채바우-골[골] 부채바위가 있는 골짜기. 골짜기 곧곧에서 사람들이 치성을 드린다고 함.
- 북-바우[바위] 세강터 남쪽에 있는 큰 바위. 이 바위로 마을 이름이 생김
- 비들미기-골[골] 부수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비들기목처럼 생겼다 함.
- 사내-들[들] 농바우 동쪽에 있는 들. 사내리쪽이라 함.
- 산저-골[골] 샛강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새들-보[보] 샛강터 북동쪽 백현 아래 속리천에 있는 보.
- 새-보[보] 샛강터 동쪽 속리천에 있는 보. 새로 만들었다 함.
- 새봇-들[들] 샛강터 북동쪽에 있는 들. 새보로 용수함.
- 서낭-골[골] 부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이 있었다 함.
- 섯밭-들[들] 부내실 남쪽에 있는 들. 들이 길고 끝이 뾰족한 모양으로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함.
- 소리-목(松峴)[고개] 소리목에서 사내리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 큰 소나무가 빽빽이 있었다 함.
- 소리미기-골[골] 부수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부수골과 소리목의 길목임.
- 수무-골[골] 부수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늘메기 옆에 있음. 산외면 신정리로 가는 길목임.
- 안장-바우[바위] 부수골 북쪽에 있는 바위. 안장처럼 생겼다함.
- 옥녀-봉(玉女峯;469m)[산] 부내실 남쪽에 있는 산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 하며 기우제를 지냄
- 요도-골[골] 부수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수무골 아래에 있음.
- 자동차-바우[바위] 샛강터 북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자동차처럼 생겼다함.
- 장정곡이-골[골] 부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장정곡이골 아래 서당골 반대편에 있음. 전에 절이 있었다고 함.
- 중산-들[들] 터골남쪽에 있는 들. 전에 중이 살았다 함.
- 청승-대(靑城臺)[바위] 샛강터 북쪽 속리천 냇가에 있는 바위. 장승처럼 우뚝서 있다하여 ‘청승대’라 부른다. 깊은 동굴이 있는데 동학혁명때 많은 사람들이 이 굴속에 피신한 일이 있어 이름난 바위다.
- 총쟁이-골[골] 부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사냥꾼들의 길목이라 함.
- 칼-바우[바위] 부내실 남쪽에 있는 바위. 칼날처럼 생겼음.
- 큰-들[들] 샛강터 북서쪽에 있는 큰 들.
- 큰들-보[보] 샛강터 남쪽 속리천에 있는 보. 큰들 관개용으로 용수로가 마을 중심을 통과한다.
- 탕건-바우[바위] 부내실 동쪽에 있는 바위. 탕건처럼 생겼음.
5. 문화유적
- 민속
산제 : 정월 초하루 저녁 소리목에 있는 산제당에서 거행하고 있음.
6. 산업
7. 기타
1991년 세강터 마을 입구에 마을 자랑비를 세웠음. 옛북암초등학교 청소년 야영장이 개설 운영되고 있다.
사내리(舍乃里)
1. 위치
면적 22.3㎢, 인구 625가구 1814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동쪽 6㎞ 지점인 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대목리(大木里), 서는 북암리(北岩里), 남은 상판리(上板里), 북은 경북(慶北)과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법주사(法住寺)가 있으므로 사내골, 또는 사내동(舍乃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新基) 민판동(民判洞)을 벼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민판-골(民判洞)[마을] 사내골 북쪽에 있는 마을. 조선초기 황참판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속세에 은거하다 별세하자 그 자손들이 시묘한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하여 ‘민판동’이라 함. 사내 3리의 으뜸되는 마을임.
- 사내-골(舍乃洞)[마을] 사내리의 으뜸되는 마을.
- 새-터(新基)[마을] 민판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1907년 신설되었다 함.
- 중-뚱지[마을] 청주나들 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절이 있었다 함.
- 청주-나들[마을] 사내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청주 관가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함.
4. 기타지명
- 감로천(甘露泉)[샘] 문장대 북쪽 틈 사이에 있는 옹달샘.
- 개미-골[골] 법주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쉰 동굴이 있음.
- 거북-바우(龜岩)[바위] 수정봉 정상에 있는 넓고 편편한 큰바위 상하 두 계단으로 깔려서 백여명이 앉아 즐길 만하며 한눈에 법주사 경내 일원이 똑똑히 보임.
- 걸방-바우[바위] 민판동 서쪽에 있는 바위.
- 경업-대(慶業臺)[바위] 금강골 북쪽에 있는 바위. 입석대 좌측 아래가 됨.
- 경업대-토굴(慶業臺土窟)[굴] 법주사 동북방 5.5㎞ 위치한 경업대에 있는 자연동굴. 조선명장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스승인 독보대사(독보대사)와 같이 7년간 수도하였던 곳이라 한다. 토굴 속에 맑은 옹달샘이있으니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 관음-골(觀音溪)[골] 관음봉 아래 골짜기. 속사티로 넘어가는 등신로 일대로 장엄한 계곡이다. 울창한 수림사이로 맑고 찬 시냇물이 흐르며 뭇 산새 울음소리와 화음을 이루고 있다. ‘큰물골’이라고도 부른다.
- 관음-봉(觀音峰 : 9983m)[산] 법주사 북쪽 계곡 안에 있는 봉우리로 문장대 서쪽으로 ‘큰물골’ 건너에 있음. 관음이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말한다. 보살은 대자 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우면 곧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 관음-암(觀音庵)[절] 법주사 동북쪽 4.52㎞ 지점에 위치한 절로 ‘경업대토굴’이라고도 부름.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라고 하여 관음암이라 하였다고함. 663년 (신라 문무왕 3) 회월대사(晦月大師)가 60게때 창건하고 168세때 입적하였다고 하는데 장수의 비결은 아침에는 새벽공기를 마시고 낮에는 솔잎을 먹으며 저녁에는 과음암의 장군수를 마신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음.
- 금강-골(金剛溪)[골] 태봉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좌,우에 경업대와 비로봉이 솟아 있는 계곡으로정상에 입석대가 있어 ‘입석동(立石洞)’ 이라고도 한다. 금강산같이 경치가 좋다고 하여 골짜기 안에 비로산장과 금강휴게소가 있다.
- 금강-소(金剛沼)[소] 목욕소와 세심정 사이에 있는 웅덩이. 바위 사이로 약 2m의 폭포가 있다.
- 남-산(南山 :634m)[산] 법주사 남쪽에 있는 산. 산자락의 가을 단풍이 절경이다.
- 남산-약수(南山藥水)[샘] 법주사 남쪽 3km 지점인 남산 바위 사이에서 솟아나는 물로 맑고 단맛이있어 한 번 마시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이 약수는 깨끗지 못한 일이 있으면 즉시 말라 나오지 않고 마음이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오히려 피해를 본다고 함.
- 냉천-골(冷川溪)[골] 중사자암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문장대 등산로가 됨.
- 달마-골(達磨溪) 세심정서쪽에 있는 골짜기. 문장대 등산로 길목으로 골안에 ‘용바위골휴게소’가 있다.
- 달매-재[고개] 중사자암 남쪽에 있는 고개. 달마골을 이용하여 문장대로 넘어가는 고개.
- 도독-골[골] 민판동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동-암(東庵)[절] 법주사 뒤쪽 200m 지점에 이쓴 산내 암자임. 창건은 구전에 의하면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암자의 배치는 선원(禪院)을 중심으로 좌우의 앞쪽으로 두 요사가 있고 입구에서 가장 안쪽으로 법당이 들어서 있다. 법당은 1979년 정오(正浯) 선당은 1978년 요사는 1978년 1979년에 건립되어 1980년 1월 21일 낙성한 것이다.
- 돼지-바우[바위] 법주사 동쪽 태평휴게소 위쪽에 있는 큰 바위. 돼지와 흡사하다고 함.
- 돼지바우-골[골] 돼지바위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까지 이어진다.
- 뛴금-바우[바위] 경업대에 있는 바위.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함.
- 목욕-소(沐浴沼)[소] 법주사에서 북천암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웅덩이.
- 문장-대(文藏大)[바위] 법주사동북쪽 6km 지점에 솟아 있는 큰 바위 덩어리. 해발 1,028m의 봉우리로 50여명이 앉아서 놀 수 있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 ‘운장대(雲藏臺)’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물푸리-골[골] 사내리 시외버스주차장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밤나무-골[골] 민판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밤나무가 많이 있다고 함.
- 배석-대(拜石臺)[바위] 천황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있는 바위. 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함.
- 밤-바우[바위] 민판동 서쪽에 있는 바위. 범이 앉아있는 모습과 같다고 함.
- 법주-사(法主寺)[절] 대하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553년 (신라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법주사라고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이 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표가 중창한 이래 이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의 증수를 거쳐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전소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의 증건 증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보현-재(普顯峙:621m)[고개] 북천암 북쪽 문장대 등산로에 잇는 고개. 정상이 가파르므로 ‘할딱고개’라고도 부르고 있다.
- 북천-암(福泉庵)[절] 법주사 북쪽에 있는 암자. 법주사 산내암자중 가장 규모가 크며 반월형의 기이한 모습으로 건축되어 있다.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며 현재 암자의 본당인 극락전의 현판 ‘무량수(無量壽)’는 고려공민왕의 어필이다.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난치병을 치료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그때 이 암자에서 신미(信眉)와 학조(學祖)의 두 고승과함께 3일동안 기도를 드린뒤 암자에 이르는 길목의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으므로 절을 중수하였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옥판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큰 암석이 있고 그 속에서 청명한 청수가 솟아 흘러나오고 맑고 영롱하며 담백한 맛이 있어 복천이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 봉곡-암(鳳谷庵)[절] 민판동 서쪽 승바골에 있는 암자. 구전에 따르면 1606년(선조 39)에 벽암각성(碧巖覺性)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61년 송행신(宋行信) 비구니가 흙벽돌로법당, 삼성각, 요사 등을 중창하였다.
- 북가-재(北加峙:779m)[고개] 민판동에서 상주시화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북가추리’라고도 부른다.
- 북가치-골[골] 사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북가재로 가는 길목임.
- 붉은디기-골[골] 민판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비로-봉(비로봉:1029m)[산] 법주사 동북쪽 5.4km 지점에 있는 산봉우리. 비로란 비로지나불(毘盧蔗那佛)을 줄인말로서 ‘모든곳을 두루 비친다(遍照一切處)’란 뜻으로 광명을 뜻한다.
- 사내실-골[골] 사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사내-천(舍乃川)[내] 사내골 동남쪽에 있는 내. 수원이 삼파수의 하나로 한강으로 흐른다.
- 산지창-골[골] 민판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민판동에서 법주사로 가는 길목임.
- 상고-암(上庫庵)[절] 비로봉 밑에 있는 암자. 720년(성덕왕 19)에 창건 하였으며 처음에는 법주사를 짓기 위하여 자재를 저장하였던 창고로 이용되다가 뒤에 암자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비로봉을 중심으로 모자성을 구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던곳이라 해서 뒷날 상고암이라고 부르게되었다고도 한다. 1876(고종 13) 인명대사(仁明大師)가 중창하였고 1897년(광무 2)에 보봉(普峰)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광복후 황폐화 되었다. 1963년 법혜(法慧)의 원력으로 다시 세웠고 1975년에 극락보전 1976년 영산각과 남북통일기원탑을 세웠다. 원래 속리산에는 상고, 중고, 하고의 3고가 있었으나 중,하고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 상환-암(上歡庵)[절] 법주사에서동쪽으로 3.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암자.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다. 1391년 (공양왕 3)에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1464년(세조 10)에 왕이 이 곳에 서동하여 선왕의 유덕을 추모하는 즐거움이비할데 없다 하면서 ‘상환암’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 아래에 중환 하환의 고적이 있는 것을 보면 상환의 상은 임금을 뜻하는 존칭은 아닌듯한다. ‘상관암(上觀庵)’이라고 표기하는 사람도있는데착오이다. 6.25때 전소되었던 것을 1963년 원통보전과 삼성각을 1968년에 요사채를 건립하였다.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수도처로 청담(淸潭)을 비롯한 많은 고승이 머물렀고 상환암 혀파은 퇴경(退耕) 권상로(勸相老)의 글씨이다.
- 서낭-재[고개] 사내골에서 북암리소리목으로넘어가는 고개. 성황당이 현재까지 있고 치성을 드리고 있다.
- 석-문(石門)[바위] 금강골 서남쪽에 있는 바위. 사람이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이있음. 속리산에는 8개의 석문이 있는대 내(內), 외(外), 상환(上歡), 상고내(上庫內), 비로(毘盧), 추래(墜來), 상고외(上庫外)등으로 이 석문은 금강석문(金剛石門)이다.
- 속리-산(俗離山:1058m)[산] 백두개간에위치하여 보은군. 괴산군과 경상북도상주시의 경계에 잇는 산.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이며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변성퇴적암이 군데 군데 섞여 있어 변성퇴적암 부분은 길게패이고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이룬다.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1028m), 길상봉(吉祥峯), 문수봉(文殊峯), 보현봉(普賢峯), 관음봉(觀音峯:983m), 묘봉(妙峯:825m), 수정봉(水晶峯:489m)등의 8개의 봉우리와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신선대(神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등 8개의 대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속리산은 본래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 하며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불리웠다 한다.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들이 구름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玉芙蓉)같이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속리산은 수려한 경치와 다양한 동식물. 큰 사찰인 법주사와여러 암자가 있고 무수한 문화 유적이 산재하고 있어. 법주사를 중심으로 천황봉,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원 1922면4618㎡를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하였고. 1970년 3월 24일 지리산, 경주, 계룡산, 한려해상에 이어 설악산, 한라산과 함께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번호 6)
- 속사-재(俗寺峙:750m)[고개] 법주사에서 상주시 화북면 대흥리로 넘어가는 고개. 속리산에 있는 큰 절로 통하는 목으로 8목의 하나라고 함.
- 수영동-약수(壽永洞藥水)[샘] 법주사동쪽 6km 지점인 소천황봉 바로 아래에 있는 약수 원래는 상.중.하. 3개소가 있었으며 이 약수는 상탕이라 하는데 한 모금 마시면 상쾌한 맛이 비길 데 없고 주위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노송으로 싸여 있어 별천지 같다고함.
- 수정-교(水晶橋)[다리] 법주사입구에 있는 다리. 옛날에는 석교(石橋)로 그 위에 다락(樓)을 건립하고 다락 아래로 통행하다가파괴되어 목교(木橋)로 변경 가설하였다가 1968년 현재의 교량으로 가설되었음. 조선초기 신여선사(信如禪師)가 이 다리 위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삼천동 돌아드는 아홉구비, 한줄기냇물위에 아홉달.
다리 밑 푸른물을 시샘하는 붉은 빛, 온 산 단풍잎이 솔가지랑 얼켰구나
三淸洞有九重遙 一帶溪流八處橋
橋下水明紅佦碧 滿山楓葉依松捎
- 수정-봉(水晶峰:489m)[산] 법주사 서쪽 가장 가까이에 있는 봉우리, 수정봉이라는 이유는 법주사 남쪽에 있는 남산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하여 (수성)을 가진 수정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상에 거북바위가 있다.
- 수정-암(水晶庵)[절] 법주사 서남쪽 200m 지점에 있는 암자. 553년 (진흥왕 14)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법주사와 함께 창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법주사 사적기에 수정암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옛터에 창건한 근세의 암자인 것 같다. 1914년 비구니 장태수(張泰守)가 이 곳에 머물면서 그 개인의 원력으로 의자(義子) 방인혁(龐寅赫)에게 위촉하여 산신각, 칠성가, 독성각과 대선방을 목수 박덕홍(朴德弘)이 김창식(金昌植)의 감동아래 신축하였으며 1973년에 극락전, 진영각, 요사체등을 중건하였다. 현재 법주사 경내의 유일한 비구니 수도장이다.
- 승방-골[골] 민판동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봉곡암이 있다.
- 쉰동-골[골] 법주사 북쪽 개미골 안에 있는 골짜기.
- 쉰동-굴(五十洞窟)[굴] 법주사 북쪽 약 1km 지점에 있는 자연동굴, 임진왜란 때 이굴에서 50여명이 피난하였다고 한다. 자연젹으로 형성된 굴의 모습을 이용하여 암자를 만들고 부처를 모시고 있었으나 1975년 국가시책인 독립가옥 정리시철거되었다.
- 신선-대(神仙臺:1026m)[산] 법주사에서동북쪽 약 5.7km 지점으로 경업대 바로 위쪽 입석대와 청법대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암석덩어리의 산봉우리.
- 심배나무-골[골] 청주나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여적-암(汝寂庵)[절] 법주사에서 수정봉넘어 민판동 북쪽에 있는 암자. 1694년(숙종 20)여적당(汝寂堂) 경수(慶秀)가창건하였다. 그 후 1901년(광무 9)에 주지 남용익(南龍翊)이 강문환(姜文煥)의 도움으로 삼성각을 창건하였으나 6.25때 모두 불타고 터만 남았다. 현재 암자 주위에 남아 있는 터를 볼 때 암자의 규모가 컸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58년 수도승이 여적대사가 득도한 곳이라 하여 조그마한 초막을 짓고 살던 것을 1964년 행담(行潭)이 중창하였다. 경내에 정교하게 다듬어진 청석탑 1기가 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부터 있던 암자로 여적이 온 뒤부터 ‘여적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오리-숲(五里林)[거리] 사내리 마을에서 법주사에 이르는 약 2km 거리로 길 좌우에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있어 ‘오리숲’이라 한다.
- 은폭-동(隱瀑洞)[폭포] 상환암 동남쪽에 있는 폭포로 깊은 굴속에서떨어지기 때문에 물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린다고 함.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물이란 넘실넘실 흐르는 건데, 너는 어이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사람들 더러운 발 씻을까 하여, 몸은 감추고 소리만 내네
洋洋彌水性 何事石中嗚 恐耀?人足 藏踪但流聲
- 입석-대(立石臺:1003m)[바위] 법주사 동북쪽 5.5km 지점에 있는 선돌모양의 바위. 밑에 철편이 박혀 있고.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세웠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왕녀인 덕만(德曼)과 왕자 법승(法昇)을 데리고 와서 피난을 할 때이 바위를 세우고 매일 아침 이 대에서 부왕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를 하였다 한다.
- 작은-소리목골[골] 사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북암리 소리목으로 가는 길목임.
- 작은-어우동골[골] 청소년 야영장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장군-하지기시골[골] 사내리 남서쪽, 은구모롱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장군-수(蔣軍水)[샘] 관음암 석굴 속에서 나오는 샘물, 용의 양쪽 눈에 해당한다 하여‘ 용안수(龍眼水)’라고도 부른다 임경업(林慶業)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고 한다함
- 중사자-암(中獅子庵)[절] 문장대 아래에 있는 암자, 원래 상사자, 중사자, 하사자의 세 암자가 있었으나, 상, 하 두 암자는 폐사되었다 한다. 바위 모양이 사자와 가타고 하며 지형이 사자와 같다고도 한다. 보은 8항의 하나인 사자항이라고 이르고 있다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세조는 이 암자에서 복국이물(福國利物)을 기원하였으며 1641년(인조 19)에 지선(智禪)이 왕명에 따라 원종(元宗)의 원당(願堂)을 세울 때 능원대군(綾原大君)이 용화에 있는 전답을 이 원당에 화사하였다 1795년(영조 35)에는 왕명에 따라 명례궁(明禮宮) 궁감(宮監) 이수창(李壽昌)과 주지 현익(玄益)이 감동하여 증수하였고 1887년 (현종 3)에는 왕실에서 총섭(摠攝) 하운(夏雲)과 신영원(申英遠)을 파견하여 중수하였으며 1887년(고종 24)에는 왕실에서 천동(千銅)을 하사 받아 일시 중창하였다. 6.25때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 중건하였다. 암자 서편에 인공으로 깍은 듯한 감투바위가 있는데 차언당시 산신당 터라 하며 암자 아래 초석만 남아 있는 터는 선조(宣祖)의 원당처로 선조는 원당을 짓고 어필의 병풍을 하사하였다 한다. 이 어필병풍은 법주사에 보관중이다.
- 천황-봉(天皇峰:1057.7m)[산] 법주사에서 동쪽으로 5.7m 지점에 있는 속리산 최고봉우리다. 삼파수(三派水)가 있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의 근원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의 근원이 되고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한강의 근원이 된다.
- 청법-대(聽法臺:1008m)[산] 문장대와 신선대 사이에 있는 봉우리,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영혼을 잃고 방황하던 중 이 봉우리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제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 추래-암(墜來巖)[바위] 법주사 서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 그 아래 열반굴(涅槃窟)이 있고 굴속 바위벽 오른쪽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왼쪽에 약사여래(藥師如來)을 새겼음. 바위위에 한 그로의 노송과 돌탑이 있고 바위 벽에는 나무아미타불(男無阿彌陀佛)이라 새겨져 있다.
- 큰-물골[골] 관음봉과 문장대 사이에 있는 골짜기. ‘관음골’이라고도 한다.
- 큰-소리목[골] 사내골에서 북암리 소리목으로 가는 골짜기. 수정초등학교 옆으로 나 있으며 작은 소리목 아래에 있다.
- 큰-어우동골[골] 청소년 야영장 남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까지 이어짐.
- 큰-하지시기골[골] 사내리 남쪽 은구모롱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탈골-암(脫骨庵)[절] 법주사 동북쪽 2.8km 지점에 있는 암자.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고 776년 9혜공왕 12)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증건하였다 한다. 속설에 의하면 신라 탈해왕때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자신의 용모가 닭과 비슷함을 한탄하던 중 이곳에 좋은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와 약수를 마시고 아름다운 인간의 용모로 바뀌었으므로 탈골암이라 하였다는 설과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깨우쳐 생사윤회를 벗어나 해탈하게되었으므로 탈골암이라 했다고 한다. 1624년9인조 2)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나 6.25때 전소되어 폐허가 되었으나 1954년 재건하고 1975년에 중수하였다. 법당인 인법당과 삼성각 요사가 있고 1990년에 준공된 대휴서원(大休禪院)이 있었으나 1993년 인법당(인법당)이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95년 다시 건립하였다. 암자 좌측에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유명한 약수가 있다.
- 탈골암-골[골]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탈골암길목임.
- 탑바우-골[골] 쉰동굴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태-봉(胎峰:550m)[산] 복천암 남쪽에 있는 봉우리. 조선 제23대 순조(純祖)의 태를 1806년(순조 6)에 이 곳에 봉안하였는데 1927년 10월 서울로 옮겼다 함.
- 학소-대(鶴巢臺)[바위] 상환암 남쪽에 있는 바위. 옛날에 학이 살았다 한다. 태조 이성계가 상환암에서 100일간 기도를 올릴 때 목욕재계하고자 냇물에 이르자학의 똥이 떠내려오기 때문에 학들을 쫓아버리고 집을 메워 버린 후 학들이 깃들지 않는다 한다.
5. 문화유적
- 국보
- 법주사 쌍사자석등(法主寺 雙獅子石燈)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8각석등. 높이는 3.3m 국보 제5호. 간주(竿注)에 변화를 주어 특색을 발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8각석등으로 조성년대는 720년(성덕왕 19)이다. 쌍사자는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다물고 있는 사자는 참선하는 스님을 상징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염불과 경학을 하는 스님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속설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는 숫사자이고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암사자로 힘에 부처 입을 벌리고 있다고 한다.
- 법주사 팔상전(法主寺 哵相殿)
법주사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오층목탑(五層木塔), 국보 제55호. 5층의 높은 검룰로 5층 옥개(屋蓋)는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고 5층위에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 탑이다.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776년(혜공왕 12) 진표(眞表)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병화로 소실되어 1624년(인조 2) 벽암(碧巖)이 중건하였다.
- 법주사 석연지(法主寺 石蓮池)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石槽). 높이 1.95m, 국보 제 64호. 대석위에 원형의 석조를 올려놓은 형식이다. 이 석연지를 만든 것은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 뿌리를 내려 꽃을피우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듯이 우리의 현실은 서로가 시기하고 모함하는 연못의 흙탕물 같은 세상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착하게 생활하면 내세(來世)에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輪廻)적인 교리를 표현한 것이라 함.
- 보물
- 법주사 사천왕석등(法主寺 四天王石燈)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 신라시대의 석등. 높이 3.9m, 높이 3.9m 보물 제 15호. 이 석등은 경내의 쌍사자석등, 석연지와 공양상(供養像)을 고루 배치하여 불교의 법공양중 으뜸인 향(香), 등(燈), 차(茶)의 공양을 한꺼번에 바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 법주사 마애여래의상(法主寺 磨崖如來倚象)
법주사 경내 암석 절벽면의 부조(浮彫)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 높이 5m. 보물 제 216호. 신라시대의 삼화령석조미륵불의상(三花嶺石造彌勒佛倚象)과 함께 매우 희귀한 의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불상이 새겨진 암석 바로 앞 바위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과 미륵불 바로 옆에 새겨진 설화도(說話圖)들은 법상종(法相宗)의 신앙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법주사가 법상종의 대가람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함.
-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1742년(영조 18)에 관상감의 안국빈(安國賓)등 6명이 북경천문대 대장이었던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kogler, k)의 성표(星表:기산점 1723년)를 사용, 한양에서 볼 수 없는 남쪽하늘의 별까지포함하여 제작한 천문도, 8폭의 병풍으로 되어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 왕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1곡을 한폭으로 보면 183.5cm, 너비 56cm, 8폭의 전체 길이는 451cm나 되는 대형이다. 현재 법주사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 848호.
- 법주사 대웅전(法主寺 大雄殿)
법주사 경내에 있는 조선 중기 목조 불전(佛殿), 보물 제 915호. 1층 평면이 정면 7칸, 측면 4칸인 대포계(多包系)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건평이 170평, 높이가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이다.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極樂殿),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覺皇殿)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이며 내부에는 법신(法身), 불신(佛身), 보신(報身)의 삼존불을 중앙의 불단(佛壇)에 모셔 놓았는데 우리나라 좌불상(坐佛像)으로는 최대라 한다.
- 법주사 원통보전(法主寺 圓通寶殿)
법주사 경내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불전. 보물 제 91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인 정방형(正方形) 평면의 건물로서 주심포계(注心包系)의 단층 사모지붕의 건물이다. 내부에 관세음보살좌상(觀世音菩薩坐像)을 모셨다.
- 사적 및 명승
- 속리산 법주사 일원(俗離山 法主寺 一圓)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황봉(天皇峰), 관음봉(觀音峰)을 연결하는 일원, 사적 및 명승 제 4호 지정면적은 1922만4618㎡(5,815,421평)이다.
- 천연기념물
- 보은 속리산의 망개나무
탈골암 골에 있는 망개나무로 천연기념물 제 207호
- 지방유형문화재
- 순조대왕태실(純祖大王胎室)
복천암 남쪽 태봉에 있는 순조의 태실로 충북지방유형문화재 제 11호, 정조의 2남으로 태어난 공(공)의 태를 안치하였다가 왕위에 오른뒤인 1806년(순조 6)에 왕의 태실로서 석물을 갖추고 2.8m의 태실비를 세웠다.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태항아리를 창경원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석비(石碑)와 석조물(石造物)만 남아 있다.
-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法主寺 福泉庵 秀庵和尙塔)
복천암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부도(石造浮屠)로 높이 3.02m. 지방 유형 문화재 제12호. 조선 전기의 고승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의 부도로 1480년 (성종 11)에 조성된 것이다.
- 법주사 복천암 학조등곡화상탑(法主寺 福泉庵 學祖燈谷和尙塔)
복천암 동쪽 산기슭에 있는 조선 중기의 석조부도로 높이 2.96m. 지방 유형문화재 제 13호. 연산군때 고승인 학조대사(學祖大師) 등곡(燈谷)의 부도로 1514년(중종 9)에 조성되었으며 스승인 신미대사의 부도 뒤에 있다.
- 법주사 세존사리탑(法主寺 世尊舍利塔)
법주사 경내에 있는 고려 말기의 사리탑. 높이 3.5m 지방유형문화제 제 16호. 1362년 공민왕이 홍거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한 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였다고 함.
- 법주사 희견보살상(法主寺 喜見菩薩像)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 전체 높이는 2.13m. 몸높이는 1.36m. 지방유형문화재 제 38호. 미륵불을 향해 머리에 고배형(高杯形)의 석기(石器)를 이고 나가는 입상(立像)으로 부조(浮彫)되어 있다. 성불(成佛)의 큰 서원(誓願)을 가지고 몸과 어깨가 불에 타더라도 아미타불(阿彌陀佛)앞에 향로(香爐)를 공양하기를 쉬지 않는 보살로 사람에게백절불굴하는 강한 의지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조성된 것이라 함.
- 법주사 사천왕문(法主寺 四天王門)
법주사 경내 금강문(金剛門)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조선후기의 불사(佛寺) 산문(山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건물. 지방유형문화재 제 46호. 중앙 어간(御間)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 높이 5.7m. 둘레 1.8m인 사천왕상을 2리씩 배치하였음.
- 법주사 석조(法主寺 石槽)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 높이 1,3m 길이 4.46m. 지방유형문화재 제 70호. 법주사에 3,000승도가 살았을 당시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사용하였다고 함.
- 법주사 벽암대사비(法主寺 碧巖大師碑)
법주사 수정교 앞 거대한 바위위에 홈을파서 세운 청석비(淸石碑). 높이 2.1m 너비 1.1m. 두께 35cm. 지방유형문화재 제 71호. 비명(碑銘)은 유명조선국고속리산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부선교심육종도총섭자지쌍운변혭ㅜ애부종수교복국우세특사의발벽암대사비(有明朝鮮國故俗離山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傅禪敎十六宗都總攝慈智雙運辯慧無礙扶宗樹敎福國祐世特賜衣鉢碧巖大師碑)로 1664년(현종 5)에 세운 비다. 정두경(鄭斗卿)이 비문을 짓고 이우(李俁)가 쓰고 이정(李禎)이 전(篆)하였다.
- 법주사 자정국존비(法主寺 慈淨國尊碑)
법주사 경내 호국청동미륵상 뒤쪽에 있는 높이 2.15m 너비 1.06m의 비로 암석을 파고 세웠다. 지방유형문화재 제 79호. 삼중대광오교도승통자정국존(三重大匡五敎都僧統慈淨國尊)의 비로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세웠다. 비명은 고려국속리산법주사정국존비명(高麗國俗離山法主寺淨國尊碑銘)이고 이숙기(李叔琪)가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썼다.
- 법주사 괘불(法主寺 掛佛)
법주사 대웅전에 보관되어 있는 가로 6.5m 세로 14.5m의 대형 괘불탱화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119호. 1766년(영조 42)에 설월관성(雪月觀性)과 유암각증(裕巖覺證)이 증명하고 찬경(贊瓊)의 화주로 금어료훈(金魚料訓)이 그린 것이다.
- 법주사 철확(法主寺 鐵鑊)
법주사 경내에 있는 거대한 솥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143호. 720년 (성덕왕 19)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2m 직경 2.7m 둘레 10.8m이다. 법주사에 3,000명 승려가 있을 때 밥솥 또는 장국을 끓이는데 사용한 것이라 함.
- 속리산 사실기비(俗離山 事實記碑)
법주사 수정교 앞에 있는 높이 1.63m 너비 0.65m의 비로 보호각 안에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 167호. 1666년(현종 7)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쓴 것이다. 내용은 수정봉 거북바위에 내력을 쓰고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라 함.
- 비지정 문화재
사내리는 천년 고찰인 법주사와 산내암자가 있어 불교문화 유적의 보고로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문화유적이 산재되어 있다.
6. 산업
국립공원 속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관광서비스업과 상업이 주민의 주산업이 되고 있음.
7. 전설
- 수정봉 거북바위
옛날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다가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치었다. 이상히 여긴 태종은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한국) 명산에 큰 거북의 물형이 당나라를 향하여 많은 당나라 재보를 동국으로 들어가려 함이니 사람을 보내어 동국 방방곡곡을 탐색하여 큰 거북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태종은 도사의 말대로 사람을 보내어 사방을 찾다가 마침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돌을 발견하고돌거북의 목을 자로고서도 안심이 안 되어 돌거북 등어리 위에 10층의 석탑을 쌓아서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한다. 그리하여 목은 끊어지고 탑에 눌린 돌거북이 되고 말았다.
- 걸방바위
이 바위는 옛날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모집할 때 강원도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설악산 경치에 매료되어 산새를 구경하다가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구성하는데 참여를 못하고 설악산에 머물렀다 하듯이 속리산의 걸방바위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현재의 위치에 와 쉬면서 속리산 경치를 구경하다가 늦어서 속리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전설은 이조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7년간 수도를 할 때 큰 암석을 걸방으로 져서 놓았다 해서 걸방바위라 칭하는데 그 바위에는 걸방끈 자국이 나타나 있다.
- 목욕소
속리산 법주사에서 북천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좌, 우 양 옆으로 울창한 노송이 즐비하게 서 있고 사이사이에 절벽과 괴석이 솟아 있는 사이로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 냇물에 10여인이 편히 쉴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웅덩이가있는데 ‘목욕소’라 부른다.
세조는 속리산에서 피부병에 대한 요양도 할 겸 고승들에게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회도 갖도록 하였다.
특히 북천암에는 당시 유명한 학조대사(學祖大師)와 신미(信眉) 학열(學悅)등 법사들이 모여들어 대법회를 열었다. 세조는 법회중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신하를 물리치고 홀로 산책을 하다 이 웅덩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었다.
발이 시리도록 찬 물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맑은 물에 심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목욕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조 앞에 미소년이 나타나더니
“마마 소생은 월광태자올시다. 약사여래(藥師如來-중생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는 부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대왕의 병은 곧 완쾌될 것이니 너무 고심치 마옵소서” 하고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미소년이 서 있던 곳에 커다란 바위가우뚝 솟아 있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시비스러운 일이었으나 세조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였다.
세조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보니 그렇게도 흉측하던 종기는 깨끗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조가 목욕을 하고 병을 고쳤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된 곳이다.
- 문장대
세조가 속리산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월광태자(月光太子)라고 지칭하는 귀공자가 꿈에 나타나 동쪽으로 시오리올라가는 곳에 영봉이 있으니 그곳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을 데리고 온 종일 올라가 보니 하늘 위에 오른 것처럼 사방이 구름과 안개 속에 가린 중 영롱한 봉우리가 보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바위라 올라갈 수 없어 철못을 박고 밧줄을 늘여 정상에 올라보니 널따란 반석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세조가 집어 보니 오륜(五倫)과 삼강(三綱)을 명시한 것이라 세조가 크게 감동하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글을 읽으며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그 뒤부터 이 봉을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정상이 언제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는 봉이라 해서 운장대(雲壯臺)라고 불리기도 한다.
- 배석대
608년(新羅 眞平王 30년)에 왕비 마야부인(摩耶夫人)과 공주 덕만(德曼-뒤에 善德女王)이 왕자 법승(法昇)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의 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비로봉
진표율사가 속리산 법주사에 온 이튼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밟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쳤다. 대사가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무지개를 띠고 사방팔방으로 비추공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 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하여 구름을 타고 떠났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산봉우리를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붙여 비로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속리산 지명 유래
속리산이라는 산명을 얻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藪石記)에 의거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九峰山)이라 불리어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서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76)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주조로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소에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십니까?”하고 물었다 율사는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승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 방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하고 곧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깍아주고 계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시해 두고 다시 명주(溟州 : 지금의 강릉)을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鉢淵藪)를 창건하였다 한다. 이에 진표율가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 속(俗)과 여윌 리(離) 뫼 산(山) 자(字)로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철확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속리산 승려가 해인사의 화장실이 얼마나 큰 지 아침에 뒤를 보면 분뇨가 떨어지는 소리가 이튼날 아침에야 비로소 들린다는 소리를 듣고 구경을 하기 위하여 떠났다가 법주사와 해인사중간 지점인 직지사에 속리산에 쇠솥을 구경하러 오는 해인사 중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해인사 중이 말하기를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쇠솥이 얼마나 큰지 장국을 끓일 때 배를 띄워 노를 젓는다 하니, 얼마나 큽니까?”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소문의 엄청난 거짓을 알고 웃으며 제각기 자기의 절로 돌아왔다고 한다.
- 신선대
아득한 옛날 속리산에서 절경에 혼을 빼앗긴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업이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선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지나 신선들과 놀고자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크게 실망하고 아쉬워 하면서 그 자리르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달려갈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추래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수정봉의 산신이 산봉우리를 정리하다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변경하였는지라 괘씸하게 생각하여 “너는 이 수정봉에서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다”하고 산봉우리 밑으로 굴려 버렸는데 그 바위가 현재 위치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하늘나라의 궁전에서 정원사가 돌 사이에 낙엽이 쌓여있으므로 그 낙엽을 걷어내놓고 바위를 옮겨 놓다가 실수를 하여 지구상에 떨어지게 되었고 정원사는 기왕에 떨어질 바에야 명산인 속리산에 떨어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떨어져 내려온 바위라 하여 추래암이라고 한다.
8. 기타
1995년 사내6리에 사내리마을 자랑비를 세움.
삼가리(三街里)
1. 위치
면적 8.27㎢, 인구 51가구 126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0㎞ 지점인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慶北) 상주시(尙州市) 화남면(和南面), 서는 갈목리(葛目里), 남은 구병리(九屛里), 북은 대목리(大目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문경(聞慶)으로 통하는 세갈래 길이 있으므로 삼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불목이(佛目理), 멍어목이(駕項), 대밭말(竹田)을 병합하여 삼가리(三街里)라 하였으므로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대밭-말(竹田)[마을] 삼거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대밭골 입구에 있으며 조리대나무가 많았다 한다. 삼가 2리에 으뜸되는 마을로 삼가초등학교가 있었다.
- 멍어목-이(駕項)[마을] 대밭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 골짜기 지형을 소로 볼 때 멍에에 해당된다고 함. 보은 8경에 하나가 됨
- 삼거리(三街里)[마을] 삼가저수지가 북쪽에 있는 마을. 삼가1리의 중심되는 마을로 명장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속리산에서 무예를 닦을 때 이 마을 뒷산인 형제봉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오얏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화동(梨花洞)’이라 불러 이름이 되었는데 그 뒤 금강 상류인 냇물이 속리산 굽이 굽이에서 발원하는데 천황봉에서 발원된 만수천, 인자바위에서 발원한 대목천 그리고 상주시 화서면에서 발원하는 동관천이 이 마을에서 합수되므로 ‘삼계촌(三溪村)’이라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1914년 대목, 묘박, 구병리로 통하는 길목이라 하여 삼가리라 하였다.
4. 기타지명
- 각씨-터[터] 멍어목이 서남쪽 구병산 자락에 있는 터. 평평한 것이 수천평 정도 되는데 여자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함.
- 개-바우[바위] 멍어목이 남쪽 100m 지점에 있는 바위. 50여명이 피할 수 있는 석굴이 있음. 전에는 ‘안장바우’라고 부르다가 개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하여 지금은 ‘개바우’라 부름
- 건영-골[골] 대밭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 깃대-봉[산] 멍어목이 남쪽에 있는 산. 일제시대 측량할 때 깃대를 꼿은 적이 있음.
- 깊은-골[골] 대밭말 동쪽 동관리 가는 길목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노루-골[골] 멍어목이 남쪽 구병리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 대밭-골[골] 대밭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조리대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위쪽은 ‘큰대밭골’아래쪽은 ‘작은대밭골’이라 부름
- 범바우-골[골] 6.25때 피난민들이 기거하였던 곳. 바위가 밤같이 둥글둥글한 모양으로 생겼다 함.
- 백황소-재[고개] 멍어목이에서 상주시화서면 동관리 갈골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 화령장을 보러 다닐 때 이 고개를 이용하였다 함.
- 불목-골[골] 삼거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불목이로 가는 입구가 됨.
- 불-목이(佛目里)[터] 삼거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터. 산형이 부처의 눈처럼 생겼다고 함. 마을이 있었으나 화전정리때 이주하였다.
- 산넘어-골[골] 삼거리 서쪽 작은고개 너머에 있는 골짜기.
- 삼거-저수지(三巨貯水池)[저수지] 삼거리 남쪽에 있는 저수지. 1962년 준공된 저수지로 저수면적 120정 몽리면적 1190정으로 충북도내의 규모가 두 번째임. 삼거리 마을은 이 저수지 건설로 이전한 마을임.
- 삼정-골[골] 삼가 서북쪽 불목이 아래에 있는 골짜기.
- 송장-골[골] 대밭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수구[당] 대밭말과 멍어목이 사이 중간에 있는 성황당. 전에는 나무로 만든 장승이 서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돌로 모아 만든 탑만 있어 ‘탑거리’라고도 부르고 있음.
- 수리-봉[산] 멍어목이 동쪽에 있는 산. 산세가 매우 험하다고 함.
- 신배나무-골[골] 삼거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신선-대(神仙臺)[바위] 멍어목이 남쪽에 있는 바위. 옛날에 마을 사람들이 신선대로 나무하러 갔다가 바위위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한판 구경하고 나니 짚고 있던 도끼자루가 썩어 있었다 함.
- 신제-궁[골] 삼거리 동쪽 만수리 입구에 있는 골짜기. 신씨의 제궁터가 있었다고 함.
- 쌀개-바우[바위] 멍어목이 남쪽 각씨터에 있는 바위. 방아 쌀개처럼 생겼다 함.
- 아도산-골[골] 멍어목이 동쪽 동관리 길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아래쪽은 ‘작은아도산골’ 위쪽은 ‘큰아도산골’이라 부름
- 아랫-골[골] 삼거리북쪽에 있는 골짜기.
- 안장-바우[바위] -> 개바우
- 약물-탕(藥水)[샘] 멍어목이 남쪽 개바위 아래에 있는 석굴에서 나오는 약수.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함.
- 양생원-집터[버덩] 멍어목이 남쪽 구병산 중턱에 있는 버덩. 양생원이 집을 짓고 공부하던 곳이라 함.
- 우각-봉(牛角峯)[산] 멍어목이 남쪽에 있는 산. 지형을 소로 볼 때 뿔에 해당한다고 함.
- 은정-골(溫丼谷)[골] 멍어목이 남쪽 구병산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 안이 따뜻하며 눈이 와도 바로 녹아버리고 나무하러 갔다가 도시락을 놓아 두면 따뜻하게 데워진다고 함. ‘온정골(온정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은정골’이 되었음. 온천이 있다고 믿고 있음.
- 인수정-들[들] 멍어목이 북쪽 동관리 길목에 있는 들.
- 작은-고개[고개] 삼거리 서쪽에 있는 고개. 현재 국립공원 매표소가있음. 1958년 삼거리 저수지 침수구역으로 확정된 후 일부 이재민들이 마을을 이 부근에 신설하였다가 1970년대 독립가옥 정리시 폐촌이 되었다.
- 질마-재[고개] 멍어목이에서 만수리로 넘어가는 고개, 지형이 소에 질마를 얹은 형국이라 함.
- 탑-거리(塔- )[거리] -> 수구
- 핑경-바우[바위] 멍어목이 남쪽 우각봉 아래에 있는 바위. 지형을 소로 볼 때 목에 달린 풍경에 해당한다고 함.
- 합수-둠벙[둠벙] 멍어목이 북쪽 냇물에 있는 둠벙. 동관천과 구병천이 합수되는 곳에 있음.
- 황층-너덜[너설] 멍어목이 남서쪽 구병산 아래에 있는 너설. 황충이란 장사가 구병산에 있으면서 경상도 화북면 산성에 진을 치고 있던 견훤과 전쟁을 하였는데 화살이 멍어목이 앞들에 떨어졌다고 함.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서 화살촉을 주워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함.
5. 문화유적
- 구장오공복원기념비(區長吳工復元記念碑)
1915년 삼가1리 구장으로 재직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움.
- 군수채동환영세불망비(郡守蔡東煥永世不忘碑)
갈목고개길 확장 개통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6년에 세움.
- 육성회장 이복규송덕비(育成會長 李復圭頌德碑)
삼가초등학교 육성회장 재직중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9년 세움.
- 민속
산제 : 매년 정월에 택일하여 멍어목이에 있는 수구와 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산제당에서산제를 거행하고 있음
6. 산업
고추, 감자, 엇갈이무, 배
7. 기타
1995년 삼거리 마을앞 도로변에 마을 자랑비를 세웠다.
상판리(上板里)
1. 위치
면적 12.84㎢, 인구 88가구 263명(1999년말), 면 소재지 마을로 면의 남부에 위치하며 동은 대목리(大木里), 서는 중판리(中板里), 남은 갈목리(葛目里), 북은 사내리(舍乃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늘근이 위쪽이 되므로 웃늘근이 또는 상판근리(상판근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방바우, 진대(陳垈), 조항(鳥項), 생왕동(生旺洞), 칠송정(七松亭)을 병합하여 상판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고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
3. 자연마을
- 새-목이(鳥項)[마을] 정이품송 동남쪽에 있는 마을. 뒷산 모양이 새의 목처럼 생겼다 함.
- 새앙-골(生旺洞, 생골)[마을] 지방바우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옛날에 골짜기가 아무기가 살았는데 몇 년의 기도 끝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갔다 함. 현재는 마을이 없어지고 ‘속리산유스타운’이 건설되어 있다.
- 웃-늘근이(上板里 양지마을)[마을] 상판리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장-터[마을] 지방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장이 섰던 곳으로 면사무소 앞 마을임.
- 지방-바우[마을] 상판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바위가 문지방 같이 생겼다고 함. ‘문턱바위’라고도 하며 속리중학교와 농협이 있음.
- 진-터(陳垈)[마을] 장터 동북쪽에 있는 마을. 정이품송 남서쪽에 있음.
- 칠-송정(七松亭, 칠송정이)[마을] 장터 서쪽 법주초등학교가 있는 마을. 칠송정 나무가 있었음.
4. 기타지명
- 가마-골[골] 진터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숯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함.
- 대목-고개[고개] 새목이에서 대목리로 넘어가는 고개
- 도래-골[골] 지방바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속리중학교가 있음.
- 면화-골[골] 칠송정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쟁시 화를 면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피난하였던 곳이라 함.
- 바우-골[골] 지방바우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있음.
- 반시기-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막이골에 딸린 골짜기.
- 봉화-터(봉화불터)[터] 지방바우 북쪽에 있는 봉화터
- 불탕-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막이골에 딸린 골짜기.
- 사기장-골[골] 새양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상북-들[들] 지방바우 동쪽에 있는 들. 들보가 제일 먼저 생기고 제일 위에 위치하고있어 ‘상보(上洑)’라 하고 그 용수로 농사를 지으므로 ‘상보들’이라 부르던 것이 변한 것임.
- 새-들[들] 지방바우 서쪽에 있는 들. 새보(一洑)의 물로 관개함
- 새목이-재[고개] 새목이에서 대목리로 넘어가는 고개. ‘대목고개’라고도 함.
- 새반시기-골[골]새목이 동쪽 큰새막이골에 딸린 골짜기.
- 새양-골[골] 새양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있던 마을은 없어지고 ‘속리산 유스타운’이 새로 자리잡고 있음.
- 서북-들[들] 지방바우 동북쪽에 있는 들.
- 심배나무-골[골] 새양골 서쪽 속리천 너머에 있는 골짜기.
- 어든이-골[골] 새목이에서 삼가리 불목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 옥강-수[소] 주걱수 동쪽에 있는 소. 모양이 요강처럼 생겼다 함.
- 은구-모랭이(은구모퉁)[모롱이] 생양골 북쪽에 있는 모롱이. 은구석이 있었던 곳.
- 은구-석(恩救石)[바위] 은구모롱이 길가에 있었던 선돌 모양의 큰돌, 도로확장으로 없어졌으나 근래에 속리천에서 찾아 복원하였으나 진위는 모름.
- 작은-가마골[골] 새목이에서 삼가리불목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 작은-상투바우[바위] 장터 서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음.
- 작은-성지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막이골에 딸린 골짜기.
- 주걱-수[소] 지방바우 서남쪽에 있는 소. 모양이 주걱처럼 생겼다 함.
- 증봇-들[들] 장터 서쪽에 있는 들. 중보(中洑)로 관개함
- 지방산-골[골] 새목이에서 삼가리 불목이로 가는 길에 있는 골짜기.
- 지피-골[골] 지방바우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부터 지피나무라는 약초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함.
- 큰-골[골] 지방바우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큰-상투바우[바위] 장터 서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다 함.
- 큰-새믹이골[골] 새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까지 이어짐.
- 큰-성지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 험한-골[골] 새목이 동쪽, 큰 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5. 문화유적
- 정이품송(正二品松)
상판리 도로가에 서 있는 나무로 수령이 800년 이상된 소나무. ‘연거랑이 소나무’ ‘연걸이소나무’라고도 부르는 나무로 천연기념물 제 103호로 지정보호 받고 있음.
- 칠송정(七松亭)
법주초등학교 교내에 있었던 일곱그루의 소나무. 수령 300년정도로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한 그루만 남아 있음.
- 육성회장 이복규송덕비(育成會長 李復圭頌德碑)
삼가초등학교 육성회장 재직중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9년 세움.
- 민속
산신제 : 매년 생기복덕에 의해 날짜 시간을 정하여 면사무소 뒤편 산제당에서 산시제를 거행하고 있음.
6. 산업
- 대추, 고추, 쌀
- 기업체 현황
업체명 |
소재지 |
생산품목 |
종업원수 |
속리산 산채가공 공장 |
내속리면 상판리 168 |
취나물건조가공 |
2 |
7. 전설
- 은구석
이 돌은 본래 복천암에 있던 돌로 서기 1464년에 세조대왕이 복천암에서 기도를 끝내고 환후가 쾌차한 지라 내심 기쁨을 참지 못하여 불은에 감격함과 회춘을 기념하기 위하여 속리산 안에 있는 모든 스님을 모아 선언하기를 그 돌에 줄을 메고 끌고 가다가 힘이 빠져 멈추면 그 멈춘 곳까지의 산과 들과 전답과 집터까지 모두 절 소유가 되도록 허락할 것이다. 곧 실시하라 하였다. 스님들은 기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복천암과 법주사를 거쳐 훤히 트인 보은 가도로 6km를 끌고 왔는데 힘이 지쳤던지 물욕이 없어 그랬던지 돌이 요지부동이라 그제야 세조대왕이 웃으며 사물에는 한도가 있느니라 하며 이만하면 공양미와 식량이 되리라 하고끌고 온 돌을 그곳에 세우고 돌을 세운 곳에서 속리한 쪽으로 전 토지를 절땅으로 내려 주었다 한다. 그 후 세운 돌을 은구석이라 하고 선돌이 있는 산모퉁이를 은구모퉁이라 부르고 있다.
- 정이품송
마티재를 넘은 세조의 일행이 내속리면 상판리에 당도하니 길가에서 우산 모양의 한 큰 소나무가 한그루 우뚝 서 있었다.
세조는 소나무 아래 잠시 쉰 후 다시 길을 떠나려고 연을 타고 보니 늘어진 가지에 연이 걸릴 것 같았다. “연 걸린다.” 세조는 연을 멘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축 늘어져 있던 소나무 가지 하나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참으로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또한 소나무는 세조가 피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랄 수 있었다. 세조는 “올 때 신기하게 나를 무사히 지나도록 하더니 이제 갈 때는 기특하게도 비를 막아주니 참으로 기특하도다”하면서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正二品)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이후부터 이 소나무를 “연거랑이 소나무” 혹은 “정이품송”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진터와 가마골
조선 제 7대 임금이신 세조대왕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롭고 영리하여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랐다. 그런데 세조가 김종서 등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딸은 몹시 안타깝게 여기면서
“부왕 마마, 왜 어진 재상들을 모두 죽이시나이까, 그리고 어린 임금이 가엾지 않으십니까?”
하고 품의하였으나 세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성삼문 등 충신들을 잡아 죽이고 어린 단종까지 영월로 내쫓은 후에 죽여버리자 공주는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아바마마, 어쩌자고 충신들을 그처럼 참혹하게 죽이시고 이제 죄없는 어린 상왕마저 살해하시나이까? 후에 사람들이 아바마마를 어떻다 하오리까? 참응로 너무하시나이다.” 하고는 통곡했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참으로 방정스럽고 괴이한 계집애다. 당장 끌어 내어 사약을 먹여라.”
이리하여 공주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왕비 윤씨가 이 소리를 듣고 자식을 사랑하는 모정에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남편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하였으나 세조의 고집을 꺽을수는 없었다. 생각다 못한 윤씨는 마친대 금은 패물을 한 보퉁이 싸서 유모에게 맡기고 어디든지 공주를 모시고 가서 숨어 살 것을 부탁하였다.
공주와 유모는 남복으로 한 후 눈물을 뿌리며 대궐을 빠져나왔으나 구중궁궐 깊은 속에서 살던 그들에세 세상이 넓다 한들 어디로 가랴?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들은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발길 닿는대로 온 곳이 보은 땅이었다. 두 사람은 발을 끌다시피 하면서 걸어가다가 큰 소나무 아래 이르자 공주가
“아유 이제 더 못가겠우. 예서 쉬어 갑시다.”하고 털썩 주저앉아 유모도 따라 쉬고 있는데 마침 그때 나무꾼 한 사람이 나무를 한짐 지고 오더니 짐을 받쳐놓고 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나무꾼에게 쏠렸다. 이제 한 십 칠팔세 가량 되어보이는 준수하게 생긴 총각이었다. 나무꾼도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를 가시는 나그네이시온지 매우 피곤해 보이십니다.”
나무꾼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약간 의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무 fdjT다.
분명히 차림새는 남자임이 분명한데 젋은 나그네의 아릿다운 얼굴 모습이라든지 중년객의 목소리가 여성의 음성이었다.
나무꾼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늘은 날도 저물어 가고 또 여기서 인가가 있는 곳을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하니 저의 집이 여기서멀지 않으니 같이 가시는게 어떠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두 사람은 그 말씨나 태도가 매우 공손하고 믿으직스러울뿐더러 더 가야 남의 집에서 자기는 매일반이라, 총각의 뒤를 따라 깊은 산중 숲속 바위밑에 자리잡은 움집으로 안내되었다.
깊숙한 산중에 외딴집에서 가족도 없이 총각 혼자 살고 있는 것이 겁도 나고 의심도 적지 않았으나 워낙 총각이 공손하고 다정스러워 그날 밤 총각이 지어다 주는 밥을 먹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으나 피로가 겹친 공주가 병이 나자, 그들은 떠나지 못하고 그 움집에서 며칠을 더 묵게 되었고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두 나그네가 여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모는 총각을 불러놓고
“우리들은 본시 서울 대삿집 아녀자들이온데 큰 화를 당해 변장하고 숨어 다니는 중이옵니다. 이제 다행히 당신같이 좋은 주인을 만나 토설하는 터이오니 제발 숨겨주시어 목숨만 살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메인 소리로 호소를 하였더니 총각의 얼굴색이 순간 달라지면서 눈물이 글썽해 지며 자기도 역시 화를 피하여 이곳에 살고 있는 길이라 하며 어차피 같은 처지이니 함께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그 뒤부터 그들은 한솥밥을 먹고 한방에서 기거를 하게 되어 부지중에 젊은 두 남녀는 정이 들게 되었고 이성간에 무사할 수 없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을 가려서 맑은 냉수를 떠놓고 성례를 하여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되자 총각이 먼저 물었다.
“당신은 대체 어느 댁 따님이시오? 우리 기왕 한몸이 되었으니 숨길 것이 무엇이겠소?”
그리하여 공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하였다. 한숨과누물 속에 이야기를 다 듣고난 실랑은 갑자기 일어나 공주에게 두 번 절을 하고 목메인 소리로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처음부터 귀인이신 줄은 짐작했습니다만 참으로 이럴줄은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대감의 둘째 손자올시다. 집안이 온통 망하고 가족이 모두 살해될 때 하인의 친절한 주선으로 도망쳐 나와 이곳에 숨어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주와 유모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형용 못할 야릇한 감정이 솟아 올랐다. 원수끼리 맺어진 신랑 신부. 그러나 젊은 그들은 한껏 정답고 단란하기만 했다. 실로 꿈같은 현실속에서 꿈같은 세월이 흘러 갔다.
몇 년이 흐르자 이들은 귀여운 아들 딸을 낳았고 차츰 경계가 누그러지자 값진 보물을 팔아 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서 집과 땅도 사고 그리고 뒷산 골짜기에 숯 굽는 가마를 만든 후 숯을 구워 보은 읍내에 나가 팔기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이 무렵 피부병이 든 세조임금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명산 대찰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데 마침 속리산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이들이 사는 집은 속리한 초입 길목인 정이품송 근처 마을에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공주 내외는 그 때 여섯 살 난 아들과 네 살짜리 딸에게 꼼짝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으나, 세조가 그 마을 앞 큰 소나무 아래 행차를 머물게 하고 쉬자, 동네 아이들은 웬 구경꺼리냐고 일제히 내달아와서 구경을 하게 되자 이들의 어린 두 남매도 부모님의 타이름이 있었으나 어린 호기심에 그만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때 세조가 무심히 아이들을 내려보다가 맨앞에 서 있는 어린 두 남매를 발견하고 생김생김이며 차림차림이 다른 아이들과 훨씬 돋보이는 데다 모습이 어쩌면 옛날에 죽였던 자기 딸의 얼굴과 흡사했다.
세조는 측근 신하를 불러 저 아이들의 집을 알아보라고 지시한 후 그곳을 떠났고 지시를 받은 신하는 두 남매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세조는 평복을 하고 두 명의 신하만 거느리고 이 집 앞에 당도하여 물을 얻어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하 한 사람이 물 한 그릇을 청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본즉 부왕마마가문 앞에 서 있는지라 깜짝 놀라 뒷문을 통하여 숯을 굽고 있는 남편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아이들과 함께 산을 넘어 도망을 가고 말았다.
대신이 조금 전까지 인기척이 있었는데 아무리 물을 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으므로 의심이 더럭 나서 문을 열어보니 뒷문이 열려 있고 사람의 흔적이 없으므로 이는 분명한 역적의 무리라 생각하고 세조를 급히 모시고 돌아간 후 군사를 이끌고 마을에 진을 친 뒤 군사를 풀어 아무리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 없었고 세조는 자신의 딸이 숨어 살고있음을 알고 천륜의 정이 쏠리었으나 차마 발설을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군사들이 진을 친 곳을 진터, 숯을 굽던 곳을 가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칠송정
지금으로부터 약 210년 전에 안정라씨 칠형제가 선산 묘소에 사초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칠형제가 각각 한 그루씩을 심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같은 어머니 품에서 태어난 칠형제가 한날 한시에 소나무를 심어서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기 위함이라한다. 그 후손들은 그 소나무 일곱그루를 선조가 심었다고 해서 선조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7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현재는 법주초등학교 교정에 한 그루만 남아있어 그 후손들은 물론 그 내력을 듣는 이로 하여금 아쉬운 감을 되새기게 한다.
8. 기타
1998년 마을회관 앞에 마을유래비를 세움.
중판리(中板里)
1. 위치
면적 7.1㎢, 인구 82가구 229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5km 지점인 면의 서쪽에 위치하고 동은 상판리(上板里), 서는 보은읍(報恩邑), 남은 갈목리(葛目里), 북은 하판리(下板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늘근이 중간이 되므로 중간늘근이 또는 중판근리(중판근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점촌(店村), 신기(新基), 내기(內基), 평촌(坪村)을 병합하여 중판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노재-비[마을] 병목골 북쪽에 있던 마을. 백로가 앉았다가 일어나는 자세라 함.
- 문화-마을(文化村)[마을] 1998년 농촌정주권개발사업 일환으로 큰노재비골에 조성한 마을.
- 벌-말(坪村, 아랫말)[마을] 안터골 북쪽 벌판에 있는 마을.
- 병목-골[마을] 벌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병의 목처럼 생겼다 함.
- 새터-말(新基 웃말)[마을] 벌말 동남쪽에 새로된 마을.
- 안터-골(內基)[마을] 새터말 서쪽에 있는 마을.
- 점-말(店村)[마을] 중간늘근이 동쪽에 있는 마을.
- 중간-늘근이(中板斤里)[마을]->중판리.
4. 기타지명
- 구래-들[들] 벌말 북쪽에 있는 들.
- 궁-점[산] 아래 중판 뒤에 있는 산. 활처럼 산의 지형이 휘어졌다고 함.
- 노-골[골] 새터말 동쪽에 위치한 둠벙과 논이 있는 골짜기. ‘논골’이 변하여 ‘노골’이 됨.
- 대박-골[골] 안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대차리-골[골] 벌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병목골 남쪽에 있음.
- 된-양지[산] 벌말 서남쪽에 있는 산.
- 두류-봉[산] 산모양이 가을에 곡식을 쌓아놓은 노적가리 같아 두리봉 또는 원봉(圓峰)이라고도 함. 벌말 서쪽 보은읍 성족리와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87m.
- 뒷-골[골] 벌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 뒤가 됨.
- 말랑-산[산] 벌말 서남쪽에 있는 산. 모양이 뱀처럼 생겼다고 함.
- 먹-골[골] 벌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먹을 만들었던 골짜기였다 함. 지금도 먹을 만들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함.
- 물건너-들[들] 벌말 동쪽에 있는 들. 속리천 건너에 있음.
- 병목-골[골] 벌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속리천 건너 물건너들 동쪽임.
- 상투-바우[바위] 벌말 동쪽 냇가에 있는 바위. 상투처럼 생겼음.
- 상투바우-둠벙[둠벙] 상투바위 밑에 있는 둠벙.
- 새목이-재[고개] 중판리에서 보은읍 성족리로 넘어가는 고개.
- 새챙-이[골] 벌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가 뱀같이 생겼으며 백로가 뱀을 쪼아먹는 형상이라 함.
- 새챙이-고개[고개] 벌말에서 보은읍 종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 소실티-고개[고개] 안터골에서 외속리면 장재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가파라서 짐을 싣고 가는 소가 실태를 많이 하여야 한다함.
- 소실티-골[골] 소실티고개로 가는 골짜기.
- 소실티-산[산] 벌말 서남쪽에 있는 산. 소실티고개가 있다.
- 아그배-둠벙[둠벙] 벌말 동북쪽에 있는 둠벙. 근처에 아그배나무가 있었다 함.
- 아랫-배나무골[골] 벌말 서남쪽 소실티골 보은읍 쪽으로 있는 골짜기. 전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함. ‘큰배나무골’이라고도 한다.
- 안-골[골] 점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열두-구비[골] 아랫배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안에 열두굽이가 된다함.
- 웃-배나무골[골] 아랫배나무골과 열두구비 가운데 있는 골짜기. 새목이재로 가는 길목이며, 현재 터널을 뚫고 있는 지점이 됨.
- 작은-두류봉[산] 뒷골 북쪽에 있는 산. 두류봉보다작음.
- 작은-상투바우[바위] 상투바위 북쪽에 있는 작은바위.
- 작은상투바우-둠벙[둠벙] 작은상투바위 밑에 있는 둠벙.
- 잣남-배기[골] 점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잣나무가 많음.
- 중석-골(中石谷)[골] 중석이 많이 나왔다 하여 중석골이라 함.
- 중판-들[들] 새터말 동쪽에 있는 들.
- 중판-보(中板洑)[보] 점말 동북쪽 속리천에 있는 보.
- 중판-하보(中板下洑)[보] 새터말 동쪽 속리천에 있는 보.
- 즈망-골[골] 점말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참샘-골[골] 새터말 동쪽 속리천 건너에 있는 골짜기. 참샘이 있다 함. ‘노골’옆이 됨
- 첫주발-골[골] 안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소실티 고개로 가는 길목. 북쪽으로 있는 첫골짜기.
- 초지박-골[골] 대박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큰-들[들] 벌말 북쪽에 있는 들. ‘하들’이라고도 한다.
- 통구미-골[골] 점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중판보 서쪽 골짜기임.
- 통기-마[산] 벌말 남쪽에 있는 산. 지형이 둥지우리같이 생겼다 함.
- 통뫼-산[산] 벌말 동쪽에 있는 산. 산모양이 개구리처럼 생겼다 함.
- ・평풍-바우[바위] 병목골 남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병풍처럼 생김.
- 피아-골[골] 안터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사람들이 이 곳으로 피난을 했었다 함.
- 하판-보(下板洑)[보] 벌말 북쪽 속리천에 있는 보. 하판교 다리 아래에 있음. 하판들 농업용수를 보급하는 보임.
- 황새-봉[산] 벌말 동쪽에 있는 산. 산모양이 황새의 목처럼 생겼다 함.
5. 문화유적
- 백자요지(白磁窯址)
점말 왼쪽 낮으막한 구릉지가 있다. 문헌의 기록이나 발굴자료가 없어 상황을 알 수 없으나 대접과 접시 등 생활용기가 흩어져 있어 폐요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생활용기를 생산하여 일반에게 공급하던 민간요지로 추정된다.
6. 산업
담배, 고추, 쌀
7. 기타
1994년 마을 자랑비를 도로변에 세웠음.
하판리(下板里)
1. 위치
면적 9.1㎢, 인구 42가구 142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 7km 지점인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사내리(舍乃里), 서는 보은읍(報恩邑), 남은 중판리(中板里), 북은 북암리(北岩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늘근이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늘근이 또는 하판근리(下板斤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철령(水鐵嶺)을 병합하여 하판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늘그-니(板斤里)[마을] 상판리와 중판리에 걸쳐 있었던 마을 다래나무 밀림을 노인이 들어와 개척했다고 함. 현재는 하판리 마을.
4. 기타지명
- 꼬부랑-재[고개] 늘근이에서 북암리 무수목으로 넘어가는 고개. 꼬불 꼬불함.
- 구룡-티(九龍峙)[고개] 늘근이에서 보은읍 종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아홉굽이가 졌다고도 하며 아홉 용이 나타날 지형이라고도 함.
- 구룡티-골[골] 늘근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구룡티가 고개가 있음.
- 낡은텃-골[골] 늘근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노재-비[골] 늘근이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황새가 노를 저어 날아가는 모양을 했다 하여 ‘노자비’라함.
- 노재비-고개[고개] 늘근이에서 사내리로 넘어가는 고개. 노재비골을 지남.
- 논-골[골] 늘근이 동남쪽 노재비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논만 있음.
- 덤-바우[바위] 수가마골에 있는 바위. 바닥이 있는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서 동네를 내려다 본다 하여 덤바위라 함.
- 물래방간-둠벙[둠벙] 늘근이 서남쪽 속리천에 있는 둠벙. 물레방아가 있었다 함
- 산자-골[골] 늘근이 서쪽 중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산제당이 있어 ‘산제당골’이라 하던 것이 변한 것임.
- 새번-들[들] 늘근이 서남쪽에 있는 산. 산이 내려오다 들이 되었다 함.
- 섯밭-들[들] 늘근이 동북쪽 북암리와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들.
- 섯밭들-보[보] 늘그이 서북쪽 속리천에 있는 보. 섯밭들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음.
- 수가마-골[골] 늘근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이곳에서 숯을 구웠다 함.
- 움-골[골] 늘근이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움집이 있었다 함.
- 작수-골[골] 늘근이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시대 탐관오리가 난을 피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함.
- 작은-부내실[골] 늘근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북암리 부내실 위에 작은 골짜기로 북암초등학교 뒤쪽에 있음.
- 장승-배기[길] 늘그니 북쪽에 있는 거리. 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함.
- 저녁-바우[바위] 추재나무골에 있는 바위. 해가이 바위에 걸리면 저녁때라 함.
- 증산-골[골] 늘그니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절에 있었다 함.
- 중산-들[들] 중산골 앞에 있는 들.
- 중산골-보[보] 늘그니 서쪽 속리천에 있는 보. 중산들 관개용임.
- 추재나무-골[골] 수가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추자나무가 있었다 함.
- 큰-골[골] 노재비고개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 큰-너덜[산] 늘그니 서쪽에 있는 산. 돌산이 면적이 크다하여 큰 너덜이라 함.
- 하판-들[들] 늘그니 남쪽에 있는 들.
- 하판-보(下板洑)[보] 늘그니 남쪽 하판교 아래에 있는 보.
5. 문화유적
- 민속
산제 : 매년 정월 초이튿날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거행하고 있음. 이 때 마을 앞 느티나무에 금줄을 치고 잡인의 통행을 금하고 있다.
6. 산업
쌀, 담배, 고추
외속리면(外俗里面)
1. 위치
면적 29.85ha, 650가구 1,897명(1999년말), 본군의 동부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慶北) 상주시(尙州市)와 내속리면(內俗離面), 남은 마로면(馬老面), 탄부면(炭富面), 서는 보은읍(報恩邑)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의 지역으로서 속리산 밑이 디므로 속리면이라 하여 19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47년 2월 7일 충청북도령 제36호 행정구역 분구에 의하여 속리면을 갈라서 바깥이 되므로 외속리면이라 하여 서원, 불목, 봉비, 하개, 장내, 황곡, 오창, 장재의 8개 리와 탄부면 구인리를 편입하여 도합 9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3. 자연
장재리와 서원리 일대는 300m 이상의 산지가 계속되며, 보청천의 상류인 삼가천이 중앙을 관통하고 오창리, 구인리, 하개리와 산간 마을인 불목리에는 동남 방향으로협장하게 충적지(沖積地)가 발달하여 망상기류(網狀氣流)가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다.
4. 산업
본면에서는 감, 밤, 담배의 재배가 성하였고, 최근에는 고등 채소 재배로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장재 저수지를 이용하여 쌀 생산도 자급할 수 있게 되었다.
5. 교육・문화
면 소재지는 장내리이며 초등 1개교가 있다. 그리고 명종 4년(1549)에 서원을 창설하여 충암 김정(金淨), 대곡 성운(成運), 동주 성제원(成悌元)을 봉안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사액(賜額)되었으며, 그후 중봉 조헌(趙憲),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봉안한 고적 상현서원(象賢書院)이 서원리에 있다.
구인리(求仁里)
1. 위치
면적 1.6㎢, 90가구 275명(1999년말).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書院里), 서북쪽은 장재리(壯才里), 남은 황곡리(荒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사각면(思角面)의 지역으로 서낭나무와 다리가 있으므로 귀신다리라 하였는데 보은 원님의 처가가 이곳에 있어서 원님이 항상 찾아오므로 귀인다리(歸仁橋) 또는 求仁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목, 방아다리, 쇄실을 병합하여 구인리라 해서 탄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구인(귀신다리, 귀인다리) : 옛날 귀신교(鬼神橋) 또는 지렁이 들()이라고부르던 곳이다.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이성만(李成晩), 은만(殷晩)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당시 보은 현감으로 있던 이번(李蕃)이 영의정으로 있던 그의 아우 이여(李畬)와 함께 이 마을에 들려 두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하고 마을이름이 귀신다리가 아름담지 못하다고 하여 영의정 이여(李畬)가 “효제(孝悌)는 어진 것이 근본이다”라고 말하며, 마을 이름을 구인교(求仁橋)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행정구역 개편시 구인리라고 하였다.
- 대목이 : 방아다리 서쪽에 있는 마을. 예부터 큰 나무가 많았다고 함.
- 방아다리 : 구인 서북쪽에 있는 마을 뒷산등성이가 마치 방아다리처럼 생겼다 하며, 작은 도랑을 건너가는데 디딜방아를 걸처 놓고 다녔기 때문에 방아다리라고도 함.
- 쇄실(松谷) : 귀인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 예안(禮安) 이씨(李氏) 재실이 있는 곳으로 재실이 변한 말로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 하여 송곡(松谷)이라고도 한다.
4. 기타지명
- 마비(馬碑) : 마배라고도 하며, 암소바우 동쪽에있는 들. 하마비가 있음.
- 쇄실고개 : 쇄실에서 귀인다리로 넘어가는 고개.
- 오리샘 : 오리샘 자리에 있는 샘. 이곳에서 전에 오리를 길렀다고 한다.
- 작은골 : 큰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조파미 : 귀인다리 남쪽에 있는 들로서 조,기낭 등 밭 곡식이 잘 되는 곳으로 조 이삭이 파도치는 물결 같다하여 붙인 이름.
- 주봉(珠峰) : 쇄실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구슬같이 생겼다고 함.
- 큰골 : 쇄실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5. 문화유적
- 영창재(永昌齋)
구인리에 있는 예안 이씨 중종 소유의 재실. 1693년(숙종 19)에 예안 이씨 종증의 재실로 건립하였다가 1917년 소실되었던 것을 1922년 다시 중건하였다.
- 이항묘비(李沆墓碑)
조선 연산군 때 은사(隱士) 예안인(禮安人) 이항의 묘비다. 비문은 이조정랑(吏曹正郞) 구수복(具壽福)이 짓고 그의 사촌동생인 성균생원(成均生員) 지(漬)가 썼다.
- 이협묘비(李莢墓碑)
조선 숙종때 예안인 이협의 묘비로 비문은 조병즙(趙秉楫)이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조선조 고종때 세움.
- 항일 투사
1919년 기미 독립만세 때, 보은 고장에서는 10 의사가 있었다. 구인리에서는 이창선, 이준영, 이인하 길상리의 김용석 의사들이 길상리 뒷산 삼봉산정(三峯山)에서 음력 4월 13일밤 자정을 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친 사건이 ‘기미독립만세운동’이었다.
6. 기타
- 구인팔경(구인팔경)
(1) 오봉귀운(五峯歸雲) : 오봉산에 모여드는 구름
(2) 구병명월(九屛明月) : 구병산 위에 떠 있는 밝은 달.
(3) 행단청풍(杏亶淸風) : 행단에서 부는 맑은 바람.
(4) 유수모연(柳藪暮煙) : 버드나무 숲속에 드리운 저녁연기
(5) 옥령단풍(玉領丹楓) : 옥녀봉의 단풍
(6) 선암백설(仙岩白雪) : 선암바위의 흰 눈
(7) 조평춘수(鳥坪春樹) : 조평들에 서 있는 봄철의 나무
(8) 부천야우(鳧泉夜雨) : 오리샘에 나리는 밤비
봉비리(鳳飛里)
1. 위치
면적 3.58㎢, 101가구 314명(1999년말). 본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불목리(佛目里), 서는 하개리(下開里), 남은 탄부면(炭釜面) 북은 서원리(書院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새비랭이 또는 봉비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비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새비랭이(沙飛龍) : 봉비리의 중심 마을로 옛날 구병산에 나무가 무성하고 들에는 잡초가 우거져 철새들이 모여 들었는데 오림미(梧林)숲에는 봉황 한쌍이 살고 있어 아침이면 날아 황곡빈경산에서 놀고 밤이면 오리미 숲으로 날아왔다고 해서 사비랭이 라고 했다고 함. 또한 마을 뒤, 꼴미산(花山)이 봉황이 나는 형상이라 하여 새비랭이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새들이 날아가 버리면 마을에 흉사가 생긴다고 하여 봉황이 깃들 수 있는 오림(梧林)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 오리미(梧林) : 오동나무 숲이 있었고, 꼴미산(花山)에는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봉비가 되고, 봉황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도록 오동나무를 심고하여 오리미라고도 함.
4. 기타지명
- 갈기골 : 새비랭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갱변 : 냇가에 있는 논으로 전에는 마을이었으나 79년 농지정리로 논으로 변함.
- 곰동골 : 보도골 바탕 밑에 있는 골짜기.
- 구병산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 봉우리가 아홉 개로 절경이며, 속리산과 연계하여 “충북알프스산”으로 개발되어 가고 있음. 남쪽 산허리에는 “보은 위성중계소”가 있음.
- 굴골 : 새바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골이 있음.
- 까치실고개 : 새비랭이에서 불목리로 넘어가는 고개. 일명‘도마티’라고도 하며, 옛날 부자들이 말을 타고 이 고개를 넘으면, 유난히 까치들이 많이 날았다는 전설.
- 꼴미산(花山) : 새비랭이 뒤에 있는 산으로 산꽃들이 많았음.
- 둥고개 : 새비랭이에서 하개리 개안으로 넘어가는 고개.
- 모래봉(沙峰)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산으로 심방골 앞에 있음. 산 정상에는 묘가 있는데 떼가 살지 않는다고 함.
- 보도골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물탕 밑에 있음.
- 보도골 버덩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버덩으로 나무꾼 들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함.
- 불당골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골에서 등성이를 넘어 옛날에는 절이 있었는데 하도 빈대가 많아 스님이 떠나자 폐사되었다고 함.
- 불당골 굴 : 불당골 안쪽에 있는 구리 방만하다고 함.
- 사양골 : 새비랭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서낭골이 변한 것으로, 옛날 짐승을 잡던 사냥터가 있음.
- 산제당 : 승지골에 있는 산제당으로 정월 보름날 산제를 올림.
- 서너실 고개 : 새비랭이에서 불목리 불목이로 넘어가는 고개로 작은 고개가 서너 개 있다 하여 ‘서너실고개’가 됨.
- 승지골 : 하평산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서낭당이 있어 제사를 지냈다고 함.
- 신바위 : 사양골 중간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서 사냥을 하기 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함.
- 심방골 : 새비랭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골 밑에 있으며, 지형이 깊고 방처럼 아늑하다고 함.
- 약물탕 음달사 : 새비랭이 동쪽 구병산 정상 밑에 있는 산봉우리. 정상에 큰 바위굴이 있는데 굴 속에서 약물이 나온다고 함.
- 작은문바위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고개로 서원리 안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문처럼 생겼음.
- 장사평 : 진사래 들을 말함. 사래는 이랑의 고어임
- 절골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구병산으로 이어진다.
- 진사래 보 : 하개리와 봉비리 앞들에 있는 보.
5. 기타
- 봉비리의 8경
1. 오림명월 : 봉황은 오동나무 숲에만 앉는다고 하는 우거진 숲
2. 쌍용반송 : 소나무 형상이 마치 두 용이 서린 것과 같은 소나무
3. 화산향풍 :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산에 향기로운 바람이 분다.
4. 비봉기소 : 각종 새들이 날아서 저들의 둥지로 찾아든다.
5. 진사래보 : 하개리와 봉비리 앞들에 있는 보.
6. 구병기운 : 아름다운 구병산의 구름이 서리어 있고.
7. 빈경낙조 : 빈경산에서 봉황이 저녁 노을에 놀고.
8. 금개조어 : 앞 시냇물에서는 태공들이 고기를 낚고 있는 마을이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정경이 있는 마을을 읊음.
6. 전설
조선 정조 때의 일이다. 외속리면 봉비리에 정가묵(鄭可黙)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으나, 벼슬 길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독서와 산책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마을 앞 수 만평에 이르는 토지가 황무지가 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되었으나, 부근의 전답들도 ‘달밤에도 가뭄이 탄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수리시설이 없었다. 이외로 남다른 생각이 있어 ‘삼가천 냇물’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할 것을 결심하였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발원하여 금강에 흘러가는 삼가천은 오늘날 내속리면 삼가리에 큰 저수지를 막아 유수한 수리시설을 갖춘 냇물이었지만 옛날에는 외속리면 하개리에 이르면 냇물은 모두 자갈속에 스며들어 장마 때가 아니면 좀처럼 물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을 안 정진사는 약 십리 가량 위로 올라가 외속리면 서원리 북두무니라는 냇물 웅덩이에서부터 냇물 바닥을 파서 하류로 물길을 잡아오기 시작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었지만 하인들과 동민들을 모두 설득하여 새로운 물길을 찾아 하류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하개리 마을 아래로 돌로 제방을 쌓고 보를 막았다. 엄청난 양의 물이 고였고 이 물을 이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선각자라 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칭송이 자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 이름을 ‘진사보’라고 부르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지어 살게 되었다. 사투리로 ‘진사래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불목리(佛目里)
1. 위치
면적 1.84㎢, 25가구 94명(1999년말).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남은 마로면(馬老面) 서・북은 봉비리(鳳飛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불모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불목리라 하였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불목골(불모골, 火目) : 정감록 비결파들의 지은 이름으로, 마로면 시루산에 떡시루를 걸어놓고 방화실에서 불을 붙여 불이 잘타는가를 불목리에서 들여다 보는 형국이라 하여 불목(火目)골이라 불러오다 행정구역 개편시 불목(佛目)이라고 개칭함.
4. 기타지명
- 까치실 고개 : 불모골에서봉비리 새비랭이로 넘어가는 고개.
- 노루목산 : 불목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증골 위가 되며 바위끝이 노루목처럼 잘록하게 생겼음.
- 문바우 : 지방안 입구에 있는 바위로 골짜기에 들어가는 길옆에 있어서 문바우라고 함.
- 생골 : 불모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는 마을이었으나 철거 되었음.
- 서느고개 : 불모골에서 새비랭이로 넘어가는 고개.
- 솔밭고개 : 불모골 동쪽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들녘
- 수구렁 : 불모골 남쪽에 있는 골, 논에 소나 사람들이 빠지는 곳이 많다고 함.
- 시리미들 : 불목리 서남쪽에 있는 들.
- 시집목골 : 불모골 북쪽 히미장대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
- 잡은불목골 : 불목골 서북쪽으로 잔등너머에 있는 들녘
- 재판골 : 시집목 골안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중골 : 불모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사기 그릇을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함.
- 지방안 : 불모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구병산에서 마을 바로 뒤로 나있음.
서원리(書院里)
1. 위치
면적 9.63㎢, 73가구, 167명(1999년말) 본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내속리면(內俗離面), 서는 구인리(求仁里), 남은 봉비리(鳳飛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상형서원(象賢書院)이 있었으므로 서원말 또는 서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돌리(岸乭里)를 병합하여 서원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안돌(安乭, 안돌이) : 서원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험하여 바위를 안고 돌게 되었음.
- 황해동 : 안돌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 해가 질 때 황금같이 누런 햇빛이 비친다고 함.
4. 기타지명
- 감투바우 : 갓 쓴 바우라고도 함. 모양이 갓을 쓴 것처럼 생김.
- 광대바우 : 광대밭 골에 있는 바위로 형상이 광대가 노는 형상을 하고 있음.
- 광대밭 골 : 서원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광대바위가 있음.
- 단지술 : 서원 앞내에 있는 소. 단지처럼 생겼음.
- 담싼골 : 산지당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지당골 옆이 되고전에는 담을 쌓았다고 함.
- 도장골 : 황해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안방처럼 아늑하다고 함. 도장은 안방의 고어임.
- 딸바위 : 안돌이 동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에 구멍이 있어 왼손으로 돌을 던져 들어가면 딸을 난다고 함.
- 매바우 : 매바우골에 있는 바위로 매처럼 생겼음.
- 매바우골 : 물탕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매바우가 있음.
- 매바우 둠벙 : 매바우 밑에 있는 둠벙(소)
- 맹가남 : 서원 북쪽에 있는 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맹가라는 중이 살았다고 함.
- 먹뱅이 : 안돌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에도 절이 있었는데 이름이 ‘먹뱅이’였다고 함.
- 무접뿌리 : 황해동 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 중턱에 밭이 있었는데, 황토흙이 발에 붙으면 떨어지지 않고 주위 곡식 뿌리까지 들고있었다고함. 무접벌산=무접뿌리 산.
- 문바우 : 담싼골 잔 등에 있는 바위. 문처럼 생겼음.
- 물탕골 : 황해동 뒤에 있는 골짜기로 매바우 뒤가 되며 물탕이 있음. 물탕골이 변하여 뭉탕골이 됨.
- 바람골 : 황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바람이 맑아서 ‘바람골’이라고 함.
- 벼락바골 : 황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에 벼락바위가 있음.
- 벼락바우 : 벼락바골에 있는 바위. 벼락을 맞아 깨졌음.
- 북두문이(北斗淵) : 황해동 서쪽에 있는 연못으로 형상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되어 있음.
- 비루고개 : 황해동에서 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 마루에는 큰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어 불리운 말.
- 비루고개 둠벙 : 비루고개 밑에 있는 소. 벼랑 밑에 있음.
- 산지당골 : 서원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제당이 있으며, 정월에 날을 받아 산제를 지낸다고 함.
- 생여바우 : 안돌이 동쪽에 있는 바위로 상여처럼 생겼음.
- 서원계곡 : 외속리면 서원리에서부터 내속리면 만수동에 이르는 13km 정도의 계곡으로 빼어난 경치와 오염되지 않은 물을 즐겨 찾는 곳이다.
- 서원리 공동묘지 : 황해동 뒷산으로 묘지처럼 생긴 형상이며, 도유림으로 공동묘지이다.
- 솟대나무 : 황해동 앞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삼백년이 넘어 보이고 있으며, 원님이 쉬었다 간 후 이곳에다 원님기를 세웠다고 한다.
- 수살매기 : 서원 입구에 있는 길가에 ‘수살’이라는 샘이 있었으나 도로 확장시 매워지고 없음.
- 신임이고개 : 황해동에서 내속리면 갈목으로 넘어가는 고개. 속리면 시절 면사무소가 서원에 있었고, 또한 지서는 상판에 있었기에 새로 부임하는 지서장이 면사무소를 거쳐 이 고개를 넘어 부임했다고 함.
- 아들 바우 : 안돌리 동쪽에 있는 바위에 구멍이 있는데, 이곳에 돌을 던져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함.
- 애랭이 : 안돌이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깊어 봄이면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는 골이라 하여 아지랑이골이라고도 함.
- 치마바우 : 서원 남쪽에 있는 바위로치마를 두른 것처럼 생김.
- 칠연성(七硯石) : 벼루와 같은 흔적이 있음.
- 터전들 : 서원 동쪽에 있는 들. 서원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의 마을터였다고 함.
- 품페이 : 서원 앞 냇물에 있는 소. 단지술 밑이 됨.
- 허망골 : 안돌이 남쪽에 있는 험한 골짜기.
- 희넘이재(홀어머니재, 回越峙) : 황해동에서 내속리면 갈목리 갈미기로 가는 고개. 이곳을 넘어가는 신혼 가마는 남편이 죽어 홀어미가 된다 하여 홀어머니재라고 하며, 그리하여 돌아서 간다고 해서 희너미재 회월티 라고 한다.
5. 문화유적
- 상현서원(象賢書院)
1549년(?? 4년) 보은현감 성제원(成悌元)이 이 고장 출신 기묘명현(己卯名賢) 김정(金淨)의 위패를 삼년산성내에 봉안하고 삼년성서원으로 창건하여 1610년(光海君 2년)에 사액을 받았다. 1672년(顯宗 1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대곡 성운(大谷 成運), 동주 성제원(東州 成悌元) 중봉 조헌(重峰 趙憲), 우암 송시열(尤庵 松時烈)등 4현(四賢)의 위패를 추향(追享)하였다.
1871년(高宗 8년) 서원훼철령으로 폐원될 때 강당은 보은향교에 이건 오늘의 명륜당이 되었다. 그후 1892년(高宗 29년) 김세희(金世熙)등이 옛터에 단을 만든 후 1896년(高宗 33년) 김문희(金文熙)등이 삼칸 띠집을 재건하였으며 1949년에 어윤원(漁允元)등이 지금의 건물로 고쳐 세운 것을 1971년에 보수하였다. 지방문화재 제 48호
- 서원리 소나무
지상 50cm 위에서 두 가지로벌어진 원둥치에 속리산 입구에 서 있는 정이품 송과 같이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로 수령은 600년 이상으로 추측되며, 수세가 왕성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암소나무 또는 정부인(貞夫人)소나무라고도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정이품 소나무와 내외 지간이고 그 나무가암나무이기 때문에 원가지가 두 개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35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오창리(悟倉里)
1. 위치
면적 1.97㎢, 71가구 235명(1999년말) 본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장재리(壯才里), 그리고 보은읍(報恩邑)에 둘러싸여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심리(梧心里), 사창리(士倉里), 오용리(五龍里)를 병합하여 오심과 사창의 이름을 따서 오창리(悟倉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새창이 마을 : 장자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세조께서 속리산에 가실 때 대궐터에서 야식을 하시는데 세조를 모시는 병정들이 이곳에 묵어서 세창이라하던 것이 새창이로 변했음.
- 암소바우 : 장자불 남쪽에 있는 마을 모롱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암소 발자국과 같은 자국이 있다 함.
- 오심불(悟心村) : 오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세조대왕께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속리산에서 나오고 있는 도중에 지금의 오창 1리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고 함.
- 장자불(장자촌, 장자울) : 오심이 남쪽에 있는 현재는 오창 2리가 된다. 옛날 표씨가 독점마을에서 독을 구어 생활할 때, 표씨의 큰아들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함.
4. 기타지명
- 구수고개 : 장자불에서 보은읍 길상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소의 구유같이 생겼다고 함. 새쟁이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수로 공사를 할 때, 없어졌음. 오창 2리에 있었으며 장자울 또한 장자불 독굽기 등으로 불리움.
- 담안들논 : 대궐터 앞에 있는 들. 모두 논으로 되었음.
- 동녘고개 : 오심이에서 대궐터로 넘어가는 고개로 장승고개 왼쪽이 됨.
- 목고개 : 오심이에서 장자불로 넘어가는 고개. 장승고개 오른쪽으로 이여송 장군이 세 고개의 맥을 끊어 놓았다는 전설.
- 미륵댕이 고개 : 보은읍 대야리에서 외속리면 오창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시작되는 곳에 통일탑(말티)휴게소가 있음.
- 새창이 들 : 구인리와 오창 2리 사이로 새로 개간된 들임.
- 수림이재 : 오창에서 보은으로 가는 고개로 나무가 울창했다.
- 외뎅이골 : 윗증골에서 소실티 목골 사이에 매복되었던 병사들과 교전을 하게 됨. 당시 세조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 대궐터에 머물게 되자 단종을 옹호하던 병사들이 이곳에 매복하여 있다가 발각되어 세조는 장안으로 돌아 서원 뒷산인 희넘이재를 넘어 속리산으로 가게 되어 무사하였으나, 단종을 옹호하던 세력들은 이곳에서 교전하여 전멸되었다고 전하고 있음.
- 장승배기 : 오심이에서 대궐터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는 높았으나 도로 확장으로 낮아짐. 이여송이 산새가 하도 좋아서 인재가나올 것을 두려워하여 장승배기와 목고개, 동녘고개를 잘랐다고 함.
- 저녁골 : 오심이 서쪽에 있는 긴 들, 세조께서 대궐터에 묵으실 때 이곳의 쌀로 저녁을 지어 드렸다고 함.
5. 문화유적
- 이정 묘비(李晶 墓碑)
조선 인조 때 은사(隱士) 예안인(禮安人), 송제 이정(李晶)의 묘비로 비문은 공조참판 윤창섭이 지었음. 마을 입구에 예안 이(李)씨 세거비가 있음.
- 추원각(追遠閣)
오창리에 있는 예안 이씨 종증 소유의 전면 2칸, 측면 1칸의 목조 와즙 비지정 문화재, 예안 이씨의 선대 5위를 춘추로 제사 지내기 위하여 송곡(松谷)에 비를 세웠다가 194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으로 2칸 중 1칸은 세종대왕 유서판(諭書板)을 걸었고, 1칸은 익양공(翼襄公) 이천(李薦)의 실기비(實記碑)를 세웠고 대로변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장내리(帳內里)
1. 위치
면적 3.74㎢, 138가구 381명(1999년말).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書院里), 봉비리(鳳飛里), 북서는 구인리(求仁里), 남쪽은 황곡리(荒谷里)에 위치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때, 마장(馬場) 안쪽이 되므로 장안 또는 장내(場內)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평리 사각면(思角面)의 구인리를 병합하여 장내리(帳內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새터마을 : 장터 북쪽에 새로 된 마을.
- 장터마을 : 새터 남쪽에 있는 마을로 60년대까지도 장이 섰음.
4. 기타지명
- 거무샘(墨石井) : 서봉 서쪽에 있는 샘. 아무리 가뭄 해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빛이 검푸르다 하여 검음샘이라 하던 것이 거무샘이 됨.
- 사격장 : 작은 항가골과 큰 항가골 사이에 군 부대 사격장을 1984년 설치하였음.
- 소재비골 : 장내 2리에 있는 골짜기로 일제시대 주민들이 굶주려서 소를 끌어다 잡아 먹었다하여 ‘소잡이골’이라 하던 것이 소재비골이 됨.
- 승지골(聖地) : 서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선녀들이 신선바위 옥녀봉에 내려와서 덕행을 쌓았다 하여 성스런 곳이란 뜻으로 성지(聖地)라고 함.
- 신선바우 : 장안 북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이곳에서 신선들이 놀았다고 함.
- 옥녀봉(玉女峰) : 장안 서북쪽에 있는 산. 옥여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 함.
- 작은 항기골 : 승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함씨(咸氏)들이 살았다고 하여 함가골이라 하던 것이 항기골이 됨.
- 큰항가골 : 작은 항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토골 : 서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최씨들이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토골 또는 최동(崔洞)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은 예비군 종합교육장이 되고 있음.
5. 문화유적
- 동학대도소터(東學大都所址)와 취회지(聚會址)
1893년 1월 옥녀봉 아래에 설치하였던 동학 본부였던 대도소(大都所)가 있었던 터다. 건물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1894년 10월 14일자에 기록된 도순무영(都巡撫營)의 우선봉(右先鋒) 이두황(李斗璜)의 기록에 의하면 “동리가 즐비하고 새로 지은 큰 집이 주산 아래 있는데 최법헌이 거처하던 곳이라(洞樣?比而新造一座大屋于主山之下比崔法軒之處所云)” 표현된 것으로 보아 매우 크게 지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도소가 있었던 장내리 29번지 동쪽이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2일까지 수만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길이와 너비가 각각 1백여 걸음이나 되고 높이가 어른의 허리쯤 되는 돌담을 쌓고 모두 그 안에서 농성하며 주문(呪文)을 외우고 “척왜・양창의(斥倭 洋倡義)”, “보국안민”과 “서정쇄신”을 주장한 동학교도 취회지(東學敎徒 聚會址)로 모인 당시 모인 교도의 숫자에 대하여는 “동학란기록”에는 2만여명 “일본외교문서”에는 2만 3천명, “광서조중일교섭사료”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앞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7만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상이하다. 현재는 모두 농경지로 변하였고 대도소 자리에서는 기와파편이 발견되고 취회지에는 당시 돌담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돌의 유구를 볼 수 있다.
장재리(壯才里)
1. 위치
면적 3.83㎢, 52가구 154명(1999년말). 본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구인리(求仁里), 서는 오창리(悟倉里), 남은 황곡리(荒谷里), 북은 내속리면(內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표장자(表長者)가 살았으므로 장자불, 또한 장자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재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단지바우 : 쌀개목 동쪽의 골짜기로 단지 모양을 하고 있는 마을이다.
- 대궐터 : 장자불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장재저수지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세조대왕이 신병 치료차 속리산에 오다가 이곳에서 임시로 대궐을 짓고 머물렀다 하여 대궐터가 되었으며, 오늘날 취락구조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은 모두 한옥이 되어 한옥마을이라고도 한다.
- 아랫말 : 독점 입구에 있는 마을.
- 웃말 : 아랫말 위에 있는 마을
- 작은 골 : 독점 북쪽에 있는 마을.
- 장자동(長者洞) : -> 장재리
- 장자불(壯才 壯者洞) : 표씨가 종쟁이들 집을 짓고 대궐터 동쪽 골짜기에서 독을 구워 생활 할 때 표씨(表氏) 큰 아들은 개울 건너에 살아 장자울 이라 함.
4. 기타지명
- 된비얄 : 웃말 동쪽, 속날 위에 있는 비탈로 매우 가파른 비탈임.
- 마당바우 : 한각골 너머에 있는 바위로 마당처럼 넓음.
- 말티고개(말티재, 馬峙, 薄石峴, 馬峴礴石) : 장재리에서 내속리면 갈목리로 가는 고개로 옛날에 세조대왕이 말을 타고 지나갔다고 하여 박석티라고도 하는데, 세조대왕이 고개를 넘을 때, 돌을 깔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 밀밭골 : 바랑골 앞쪽 끝에 있는 골짜기.
- 바람골 : 장재 저수지 안쪽에 있는 골짜기.
- 바른골 : 독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에서 바로 보인다고 하여 바른골이라고 함.
- 박석지 : 장재 저수지를 말함.
- 버구리 산 : 대궐터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시루봉이라고도 하며, 바구리를 엎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어 바구리산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버구리산이 되었음.
- 버구리산골 : 말티고개 올라가는 길목에서 오른쪽으로 있는 가장 높은 골짜기로 범이 굴러죽었다고 함. 범굴이 있음.
- 봉래산 : 진서들과 쌀개봉 사이에 있는 산임.
- 북바우 : 대궐터 건너편에 있는 바위, 세조가 대궐터에 행궁(행궁)을 짓고 묵을 때 앞산에 매단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전함.
- 살개목 : 독점 동쪽에 있는 골짜기, 디딜방아의 쌀개처럼 생겼다고 함.
- 샘건너 : 웃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샘 건너편에 있음.
- 소실티고개 : 대궐터에서 내속리면 중판으로 넘어가는 고개.
- 소실티골 : 장재저수지 왼쪽으로 세 번째 골짜기. 소실티 고개
- 속날 : 말티고개에서 웃말 동쪽으로 내려온 산등성이.
- 수통골 : 웃말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샘 건너 위쪽으로 술통 같이 생겼다고 함.
- 시악시골 : 소실티골 위에 있는 골짜기. 용이 승천한 구멍이 있다 함.
- 아래증골 : 장재 저수지 왼쪽에 있는 첫 번째 골짜기. 전에 점(점)이 있었다고 함.
- 아홉 모랭이 : 종쟁이들 끝에 있는 거리.
- 약물탱이 : 한각골 남쪽에 있는 약물탕.
- 오곰장 : 독점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곰 다섯 마리가 놀았다고 함.
- 웃 증골 : 장재 저수지 왼쪽으로 두 번째 골짜기.
- 작은 피아골 : 큰 피아골 밑에 있는 골짜기.
- 장재 저수지(壯才貯水池) : 장자울 북쪽에 있는 못, 1957년에 만듬. 박석티 밑에 있다 하여 박석지라 함.
- 점골 : 점동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독을 구워 팔 때 이곳에서 독을 파는 점을 쳤다고 함.
- 점동산 : 대궐터 동북쪽에 있는 산. 점골 옆에 있음.
- 종쟁이들 : 독점 마을 앞 들. 세조대왕이 속리산에 행차중 이 마을에 머물게 되어 아침시간을 알리는 북을 들 앞 바위에서 쳤다 하여 부른 이름.
- 진서들 : 쌀개목 밑에 있는 골짜기. 골이 길다고 함.
- 큰질 고개 : 웃말에서 약물탕으로 넘어가는 고개.
- 큰 피아골 : 비구리 산골 밑에 있는 골짜기.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 째 골짜기.
- 피아골: 말티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약초를 캐던 사람이 산삼을 캐서 배고픈 중에 한입 먹었더니 산삼에서 피가 났다 하여 피아골 이라 함.
- 한각골 : 한각골 고개너머, 약물탕 밑에 있는 골짜기. 외속리면 구인까지 이어진다고 함.
5. 전설
- 구름처럼 사라진 노승
세조의 행렬이 보은읍을 거쳐 대야리 앞을 지나 속리산쪽으로 나지막한 고개를 막 올라 섰을때였다 행렬 앞에 한 늙은 중이 나타나 세조대왕 앞에 합장 제례를 드린 후 “대왕마마! 이 고개 넘어 오봉산이 있사온데 이 산 아래에 행궁(行宮-임금이 여행길에 묵는 별궁)을 지으시고 오고 가실 때 쉬어 가소서”하고는 구름처럼 사라졌다. 세조는 너무나 신기하여 노승이 말한대로 행궁을 짓게 하고 행궁 앞산에 북을 달아 아침 저녁으로 북을 쳐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도록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노승이 나타났던 고개를 미륵불이 변신하여 나타난곳이라 하여 “미륵댕이 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오봉산 아래 행궁을 지었던 자리를 “대궐터” 그리고 북을 달았던 곳을 “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미륵댕이는 현재 통일탑이 서 있는 곳에서 속리산쪽으로 가는 작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고 대궐터란 장재저수지 아래 현재 한옥 집단 취락구조 마을 이름이다.
- 굽이 굽이 열두 굽이 말티고개
보은을 지나 속리산으로 가면 해발 800미터의 꼬불꼬불 열두굽이나 되는 가파른 고갯길을 말티고개라 부른다.
속리산의 관문이라 하는 이 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올 때, 닭은 길이라 하며 또 조선 세조대왕께서 올 때 얇은 돌을 깔았다고 하는데 1966년 도로 포장 공사를 할 때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으로 “박석재”라고도 부른다.
세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오실 때 외속리면 장재리에서 고갯길을 연으로 넘을 수 없어 말을 타고 고개를 넘고 나서 내속림련 갈목리 고개 밑 부락에서부터 다시 연을 바꾸어 탔다고 하여 “말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966년 말티재를 포장한 후,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
- 효자이야기
옛날 독점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지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는대도 어머니는 시름 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생명이 경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머니 곁에서 뜬 눈으로 병구환을 하던 아들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는데, 꿈에 신령이 나타나 내일 아침 말티고개 밑에 가면 한 중이 지나갈 것이니, 그를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 사정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말티고개 밑에 이르니 바랑을 짊어지고 막 고개를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효자는 그 중의팔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 중은 그의 청을 들은척도 않고 손을 뿌리치고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 때 어떻게 세게 중의 팔을 잡았는지 중의 팔이 떨어지게 되었다 팔이 떨어진 중은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오르다 지쳤는지 짊어지고 있던 바랑을 벗어 던지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효자는 한동안 넋을 잃고 중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잡고 있던 중의 팔을 내려다 보니 이것은 사람의 팔이 아니라 산삼이었다. 기쁜 나머지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그 산삼을 달여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이 바랑을 벗어 놓은 골짜기를 “바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개리(下開里)
1. 위치
면적 1.1㎢, 46가구 135명(1999년말),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봉비리(鳳飛里), 서는 장내리(帳內里), 남은 황곡리(荒谷里), 북은 서원리(書院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개안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개안 또는 하개안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점말을 병합하여 하개리(下開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개안마을 : 점말 남쪽에 있으며 냇물 갈림 안쪽에 있어 개안이다.
- 아래개안 :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보청천에 합수하는 삼가천이 장안에 이르러 양 갈래로 동남, 서남쪽으로 분류되어 흐르고 그 가운데 섬을 이루고 있는데 장안 밑에서 갈라졌다고 하여 하개안 또는 개안이라고도 함.
- 점말 : 등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어 생긴 이름
- 하개안(下開安) : 아래개안
4. 기타지명
- 등고개 : 개안에서 봉비리 새비랭이로 가는 고개로 소의 등 같이 생겼음.
- 선창소 : 개안 남쪽에 있는 소. 비결파에 의거 전국 10승지의 하나로 송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먼저 창건하였다 하여 선창(先唱)이라 하였음. 또한 신정훈이 집을 지을 때 집자리가 배의 형국이라서 배를 댈 곳이 있어야 한다 하여 이곳에 배를 대는 곳이라 하여 선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 하개 공동묘지 : 개안 북쪽에 있는 공동 묘지
5. 문화유적
- 선병국 고가(宣炳國 古家)
하개리에 있는 선정훈이 지은 한옥,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1920년 경에 지음. 대지 1만여 평에 위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 여섯 동의 주건물과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99칸집이다. 대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고 담장은 토속혼축으로 와즙이며, 주건물 사이에는 담장이 있고 일각문을 내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석조기간 위에 전면 7칸의 공(工)자형 목조와 와가팔작지붕이다. 사당은 ㄱ자형으로 팔작집이고 행랑채는 J자형 팔작집이다. 대문앞에는 선씨(宣氏)의 선조 선처흠(宣處欽)과 그의 부인 경주 김씨의 효열각이 있는데 익공(翼工) 팔작집이며, 1998년 수해로 담장이 거의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영화 촬영 장소로도 유명했었다.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 13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 선병묵 고가(宣炳黙 古家)
1940년대에 지은 건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전통적인 가옥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옆면 2칸 전・후퇴, 사랑채는 정면 4칸반, 옆면 2칸 전・후퇴를 두었다. 전체적으로 간살을 넓게 잡았고 특히 옆면에는 몸체 2칸에 전・후퇴를 두어 방을 크게Rnalf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꺽인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의 방향으로 규모가 커지고 쵯마루의 기능이 확대되는 등 1940년대의 전통적인 기법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충청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제 4호로 지정되었다.
-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 행랑채 등 전통적인 가옥형태를 고루 갖춘 194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안채, 사랑채 등 각 동이 서로 독립해 있어 남부지방의 가옥배치와 유사하며 간살을 넓게 잡고 있는점이 특색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옆면 1칸에 전・후퇴간을 두었으며, 시멘트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네모나게 가공한 주춧돌을 놓고민흘림을 한 네모기둥을 세웠다. 1고주 7량으로 일반주택으로는 큰 규모이나 고주와 평주 사이에 굽어진 우미량을 설치하였다.
1940년대 충북지방에서 전통건축기법이 계승되고 있던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충청북도 지방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다.
6. 산업
7. 기타
1991년 세강터 마을 입구에 마을 자랑비를 세웠음. 옛북암초등학교 청소년 야영장이 개설 운영되고 있다.
황곡리(荒谷里)
1. 위치
면적 1.9㎢, 49가구 156명(1999년말), 본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장내리(帳內里), 남서쪽은 탄부면(炭釜面), 북쪽은 구인리(求仁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는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거치실 또는 황곡(荒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황곡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거치실(荒谷) : 황곡 앞 들은 해마다 풍년을 이루어 황금 같은 누런 벼이삭이 춤을 춘다하여 황곡(黃谷)이라 불리어 오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고 장이 서면서 인심이 사나워지자 황곡(荒谷) 또는 거치실이라고도 함. 그러나 봉황이 날던 곳이라 하여 황곡(凰谷)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음.
- 새터말 : 황곡리 서북쪽에 새로 된 마을.
4. 기타지명
- 가자골(佳佐) : 웃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의 산수가 수려하여 부인들이 분 바르는 형이라 하여 가좌골이라 했던 곳이 가자골이 되었음.
- 가자골 샘 : 가자골에 있는 샘으로 물의 양이 일정하다고 함.
- 감나무골 : 웃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감나무가 많았음.
- 새미재 : 중간말에서 탄부면 상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고을 원님이 남녀를 타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남여재라 하던 것이 변하여 새미재가 됨.
- 동고개 : 아랫말에서 탄부면 상자리 지디기로 가는 고개.
- 말탐바우 : 빈경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하나 바위가 얹혀 있음.
- 웃골 : 중간말과 웃말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웃골 고개 : 웃골에서 탄부면 평각리 돈논으로 가는 고개.
- 장판골 : 웃골과 한자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 한자골 : 아랫말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은 고을터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환자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한자골이 되었음.
- 허재비골 : 가자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원이 있을 때 이곳에서 소를 잡아서 소잽이골이라 하던 것이 허재비골로 변한 것임